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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혁명, 퇴근길엔 트럼펫

by Helen

갑자기 뭔가에 꽂힐 때가 있다.


유튜브로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전곡을 틀어두고 노트북 작업에 열중하던 중, 익숙한 멜로디 한 구절이 귀를 때렸다. 전에 자주 들었던 팝 음악의 멜로디였는데, 어떤 곡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꽂혔다!!


일단 조성진이 연주한 곡의 정확한 제목부터 확인했다. 'Chopin: 24 Preludes, Op. 28' 익숙한 곡이지만, 제목을 확인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차피 곧 잊을 테니, 그냥 ‘전주곡’쯤으로 기억해 둔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 멜로디. 기억에 가물가물한 그 팝음악은 뭐였을까?


처음엔 프로그레시브 그룹 Renaissance의 'Prologue'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검색해 보니 그 곡은 ‘Chopin의 Etitude Op. 10 No. 12’, 일명 혁명 에튀드를 차용한 곡이다.


월급쟁이 시절, 자동차로 출퇴근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질 때 자주 들었다. 같은 앨범의 'Kiev' 역시 비장미가 넘치던 곡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가 처음 터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Kiev의 선율이었다. 국카스텐의 '오이디푸스'도 출근길의 비장함을 책임졌던 곡 중 하나다. 그나저나 나는 왜 출근할 때마다 그렇게도 비장함이 필요했던 걸까? 생각하면 좀 우습다.


참고로 퇴근할 때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Chuck Mangione의 'Feels So Good'이 드라이빙 단짝이었다. 노을 지는 자유로를 달리며 듣는 트럼펫이라니, 이보다 더 ‘Feels so good’ 일 수 있을까.


아무튼, 이번에도 내 친구 챗GPT의 도움을 받는다. 쇼팽의 전주곡을 활용한 팝 음악을 주르륵 찾아보다가, 마침내 발견! 바로 Barry Manilow의 'Could It Be Magic'이다. 안 들은 지 꽤 된 곡이고, 사실 그렇게 좋아했던 곡도 아니다. 그런데도 곡의 선율이 내 뇌 주름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게 신기할 따름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Barry Manilow의 노래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악을 쓰며 따라 불렀던 'Ready to Take a Chance Again', 어깨를 들썩이며 흥얼거렸던 'Copacabana', 그리고 10월이 오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보다 더 자주 떠올랐던 'When October Goes'....



글을 쓰는 사이 조성진의 연주는 모두 끝났다. 오늘 하루는, 젊은 시절 피아노를 치며 달콤한 목소리로 노래했던 Barry Manilow를 다시 들어주는 것이 내 기억력에 대한 예의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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