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풀기와 젠탱글
동네 알라딘에서 구매한 『1일 1 드로잉』을 매일 아주 조금씩 읽으면서 책에서 안내하는 대로 차근차근 따라 하고 있다.
제일 먼저 소개된 준비물이 펜이었기 때문에 지난주 우선 펜부터 샀다. 책에서는 스태들러 제품을 권하고 있었지만 동네 알파문구에는 스태들러가 없어서 Signo 0.38과 0.5를 골랐다. 펜 다음으로 소개된 필요 물품은 스케치북과 색연필이었는데, 다행히 집에 이미 있었다. 가끔 끄적거려 본 적이 있어 새것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 솔직히 말하면 펜도 집에 여럿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사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념 삼아, 기분을 내려고 펜을 샀던 것이다. (제일 싸게 먹히니까!)
이제 최소한의 준비물은 갖추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손풀기’를 해보라고 책이 안내한다. 샘플을 보며 따라서 그려 보니 단순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손이 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확실히 보들보들해진 것 같다.
선을 그리다 보니 문득 중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이 떠올랐다. 막 사범대를 졸업하고 첫 부임하셨던 분인데 정중앙 앞가르마를 탄 단발머리에 (살짝 앙 선생님 느낌), 딱 보기에도 ‘미술 선생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셨다. 부임 첫해라서 더 그러셨을까? 그분의 수업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의미 있었다.
학기 초에 과제를 주셨는데, 한 학기 동안 매월 한 번씩 전시회를 다녀온 감상문을 제출하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아우성을 치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전시회 같은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무조건 비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과제 자체가 싫었던 것일게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선생님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밀어붙이셨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어떻게 전시회 정보를 알아내서 여기저기 다녔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덕수궁 현대미술관도 가고, 백화점 갤러리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무료 전시도 꽤 많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감상문을 써야 하니 대충 볼 수는 없었다. 그림과 제목이 어울리는지 확인하고, 유채인지 수채인지 구분하다 보니 몇 달 지나지 않아 내 취향과 아닌 것 정도는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라는 제목인데 실제 색은 왜 회색일까? 그런데 왜 또 내 눈에는 검게 보일까?제법 그럴싸한 의문도 품기 시작했다.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전시회에 가는 행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나는 이 그림이 좋아요”라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시절 그 경험 덕분이라고 100% 확신한다.
손을 풀기 위한 선 긋기, 원 그리기를 마치고 페이지를 넘기니 이제는 젠탱글을 해보라고 한다. 드디어 뭔가 그림 같은 걸 그려보는 순간이다. 쉬울 줄 알고 샘플을 보며 대충 쓱싹쓱싹 그렸는데, 결국 8개 중 1개는 망쳤다. 갈수록 더 재미있고 다음 페이지에 뭐가 나올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