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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제주여행(서귀포 편)

3년 만에 다시 뭉친 ‘당일치기 제주 팀’

by Helen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쯤 집을 나섰다.


3년 전에는 남편이 공항까지 데려다줬지만, 이번에는 김포공항 주차장을 미리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세상의 모든 길치의 불안감은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라는 안내멘트가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법.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공항 주차장을 목전에 두고도 진입로를 두 번이나 지나쳐 20분을 허비했다. 새벽 찬 공기 속에서도 삐질삐질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걸어서, 아니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청사에 들어갔다.


아침 6시가 안 된 시간이었는데도 출국장에는 사람이 바글거렸고 예전보다 신분 확인 절차가 까다로워진 듯했다. 바이오 인증 줄과 실물 인증 줄이 보인다. 바이오 인증이라는 것이 뭘까? 그 줄이 훨씬 짧았지만 사전 등록을 한 기억도 없고 괜히 불안해서 실물 인증 줄에 섰다. 안 그래도 20분 까먹었는데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김포공항에서는 현장에서 바로 바이오 등록이 가능하다고 한다. 알았다면 짧은 줄로 갔을 텐데. 여행은 늘 이런 사소한 배움을 몰래 품고 있다.


본인 인증과 보안검색을 통과하고 나니 안도감이 들었다. 다 마시지 못할 걸 알면서도 커피를 사서 카페인을 충전하니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비행기에는 당연히 못 들고 갈 것이라 생각하고 남은 커피를 과감히 버리고 비행기에 올라탔는데 내 옆자리 대학생 손에 들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보는 순간 혼란이 왔다. 승무원도 제지하지 않는 걸 보니 허용되는 모양이었다.


세상이 빨리 변하는 걸까, 내가 세상 변화에 둔감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제주공항을 향해가고 있었다.


| 돌탑 같은 산, 바람 같은 길 — 산방산을 걷다


비행기에서 내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산방산. 멀리서 보면, 누군가가 커다란 돌탑을 정성껏 쌓아 올려놓은 것 같은 산이다. 가까이에서는 산 아래 마을과 바다가 어깨를 맞대고 있고, 그 앞을 감싸 걷는 산책로가 유독 포근하게 느껴진다. 흙길과 데크길이 번갈아 이어지고, 걸을 때마다 바다가 한 번, 들판이 한 번, 번갈아 얼굴을 내민다. 가끔 방목되고 있는 말도 보인다. 용머리해안과 송악산이 맞은편에서 인사를 건네는 구간에 이르면, 어느 순간 발걸음이 멈춰버린다. 바람, 파도, 돌, 그리고 묵직한 산 하나. 그 네 가지가 만들어내는 조용한 합주 같은 길. 절로 웃음이 나온다. 생각해 보면 내가 치아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사진은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들 밖에 없다.


| 제주에서 즐기는 해외여행? 글라글라 하와이 & 콤비노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곳은 ‘글라글라 하와이’. 허름하고 빈티지스러운 하와이 콘셉트의 식당인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와이 풍의 음악과 영어로 쏼라쏼라 하는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입구에는 유명인 사인이 잔뜩 붙어 있었는데, 그중 SK 최태원 회장 사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괜히 웃음이 났다. 테이블이 살짝 끈적거리던데 회장님 괜찮으셨을까?

메뉴는 주로 해산물로 만든 버거, 피시 앤 칩스. 전체적으로 맛이 좋은데 특히 칩스(감자튀김)가 맛있었다!


디저트를 먹기 위해 콤비노에서 나와 조금 걸었다. 지인의 안내대로 따라간 곳에 콤비노라는 젤라토 집이 있었는데 벽돌색과 초록색의 조화가 이국적인 가게다. 이탈리아 정통 방식으로 만든 젤라토를 하루에 여러 번 소량으로 생산해, 항상 신선한 맛을 유지한다고 한다. 사장님이 추천한 맛은 ‘초코금귤’과 ‘우유’. 특히 우유는 들기름·후추·핑크솔트·발사믹을 하나씩 뿌려 먹어보라고 해서 반신반의하며 시도했는데… 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였다. 집에서도 아이스크림 먹을 때 들기름을 뿌려볼까 했지만, 칼로리를 생각하면 절레절레.


| 추사의 사유가 머무는 곳, 추사관


갑자기 떠올라서 내가 제안해서 방문한 곳, 추사관. 추사관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남긴 사유와 예술, ‘세한도’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공간이다. 이곳의 설계는 건축가 승효상이 맡았다. 그는 ‘세한도’ 속 초가와 소나무, 고요한 풍경을 건축으로 옮겨 절제된 선과 여백이 살아 있는 건물을 완성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대신 돌과 나무가 어우러져, 산과 바람, 묵향이 한 몸처럼 느껴진다. 건립 과정에는 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자 『완당평전』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깊이 관여했다. 그는 추사의 예술세계를 되살리기 위해 자문과 기획을 맡으며 이 공간이 단순한 전시장이 아닌 사유의 장소로 자리 잡도록 이끌었다.

추사관과 그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지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여기 안 왔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정말 아는 만큼 보이네요!




요즘은 유적지에서 설명을 해주시는 해설자분들의 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정말 넋을 잃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유홍준 관장님의 강의를 여러 번 들어서 추사에 대해서는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분의 설명은 또 전혀 새롭게 들렸다.

중간에 해설자께서 "대흥사 가보신 분?"이라고 하셔서 자랑스럽게 손을 번쩍 들었다. 오래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참고하면서 남도를 돌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대흥사에서 추사의 라이벌(?)인 원교 이광사가 쓴 가락국수 같은 글씨 '大雄寶殿'를 봤던 기억도 문득 떠올랐다. ('가락국수 같은 글씨'라는 표현은 유홍준 관장님의 표현)

제주도 유배 가는 길,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했던 추사는 대흥사 주지이자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이광사의 글씨를 내리라고 하면서 대신 '無量壽閣'이라는 글씨를 써주고 붙이라고 했다는데,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다시 대흥사에 들렀을 때는 그때 내 생각이 잘못되었었다고 하며 이광사의 글씨를 다시 걸라고 했다는.... (유배를 통해 추사체도 완성하시고 겸손도 배우심)


| 오름인 줄 모르고 오른, 군산오름


내가 알고 있던 오름은 완만한 경사의 풀밭 언덕이 있고 꼭대기에는 옴폭 파인 구멍이 있는 곳이었는데 지인이 안내해 준 오름은 50미터 정도 이어진 데크 계단길이었고 꼭대기는 서 있기도 어려운 돌덩어리가 가득.... 내려온 다음 내가 했던 한마디 때문에 지인들이 빵 터졌는데...


우리 다음 코스가 오름이죠?


사진에서는 행복한 듯 웃고 있지만 사실은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몹시 무서웠다.


| 바다를 마시는 카페의 오후, 카페 루치아


많이 걸었으니 이젠 좀 쉬자... 하면서 들른 카페 루치아. 바다와 절벽이 맞닿은 풍경이 여유롭게 펼쳐지는 공간. 눈앞에 박수기정 주상절리 절벽과 푸른 바다를 담을 수 있어 ‘뷰를 마시는 카페'로 유명하다. 다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뷰 맛집이 그러하듯이) 커피 맛도 빵 맛도 그저 그렇다.(너무 솔직한 나) 하지만 아름다운 석양 풍경이 모든 것을 용서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웨딩촬영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화보 촬영이었던 듯. 얼마 전 쇼츠에서 스쳐 지나갔던 드라마 '연인'의 한 장면도 생각나고.... 케데헌 때문일까 유난히 갓이 아름답게 보인다.


| ‘그날의 바다’가 구워낸 생선들, 제주 할망 밥상

저녁은 ‘할망 밥상’. 뱃멀미하는 사장님이 직접 잡아온 생선을 그날그날 구워주신다고 한다. (가게 안에 그렇게 쓰여있음) 사장님이 직접 잡아온 생선을 그날그날 구워내기 때문에, 메뉴 이름도 ‘그날 정식’. 15,000원이라는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푸짐했다. 생선 이름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먹었다. 한 점은 톡 쏘는 삭힌 듯한 맛이 났는데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자리돔’ 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다시 공항, 다시 일상


새벽 김포공항처럼, 밤늦은 시간 제주공항도 사람으로 북적인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바이오 인증 줄이 더 길고 실물 인증 쪽 줄이 더 짧다. 하기야 고속도로도 하이패스가 더 밀리는 경우가 있으니 비슷한 경우겠지.

비행기에서 내려 제2주차장까지 이동하면서 카카오톡 안내에 따라 주차비를 사전 정산했다. 주차장 내 정산기에서 해도 되고, 하이패스로도 결제가 가능했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음~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내 돈 가져가는 시스템은 참 편리하게도 잘 만들어져 있다!! (세금 낼 때 카드사 포인트 쓱 수 있는 것 아시는지?)

이제 주차장만 잘 빠져나오면 되는데 새벽에 주차장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체험을 하고야 말았다. 어둡다 보니 출구 표시가 잘 안 보였던 것. 갑자기 눈앞에 하이패스 출구가 나타나서 화들짝 놀라 황급히 차를 틀었다. 다시 눈을 부릅뜨고 출구 표시를 찾아 겨우겨우 주차장 탈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루 종일 접하지 못했던 오늘의 뉴스를 들으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당일치기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집에 돌아왔을 때 정리해야 할 짐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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