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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슬로우 러닝을 시작하다

초보 러너의 도전

by Helen

| 나는 왜 갑자기 뛰기 시작했을까


산책하러 나갈 때마다 숨을 몰아쉬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러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러닝은 나와 거리가 먼 운동이다. 오로지 평지를 오래 걷는 것만 잘하는 나는 “달린다”는 말만 들으면 저절로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몇 번 시도해 본 적이 있었지만 몇 미터 가지 못하고 숨이 찼고,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벌렁거렸다. 무엇보다도 땀이 난 다음 식으면서 느끼는 썬득거림과 그 뒤에 이어지는 감기가 정말 싫었다.


그러다가 지난 제주 여행에서 마음을 바꾸었다. 여행을 가이드해 주었던 지인이 2년 전부터 마인드풀 러닝을에 푹 빠져있었는데 늘 염증을 달고 살던 몸이 러닝을 통해 회복되는 체험을 했다고 하면서 러닝 전도사가 되었던 것. 내가 달리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줄줄줄 이야기하자 그 지인은 “슬로우 러닝을 해 보세요. 그냥 뛰는 척하면서 천천히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라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슬로우 러닝? 뛰는 척? 그 말은 “너무 큰 각오 필요 없어”라는 초대처럼 느껴졌고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러닝이라는 세계에 발끝 정도를 담가볼까 생각하게 되었다.


| 뛰기 전에 공부부터


지인이 말하기를 가장 중요한 것이 '코호흡'이라고 했다.


러닝을 시작하기 전 왜 코호흡이 중요한지에 대해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챗GPT에 따르면 슬로우 러닝의 핵심은 뛰는 동안 몸이 흘러가는 리듬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인데, 그 리듬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려주는 신호가 바로 ‘코호흡이 유지되는가’라고 한다.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은 몸이 아직 무리하지 않는 구간에 있다는 뜻이고, 호흡 패턴이 무너지면 심박수도 이미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는 신호라고 한다. 그래서 슬로우 러닝에서는 코호흡이 끊기기 시작하면 잠시 걸어도 된다고, 오히려 ‘그 순간’을 잘 느끼는 것이 운동의 본질이라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코호흡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달리면 자연스럽게 복식호흡이 활성화된다는 설명이었다. 호흡이 얕아지지 않고 아래까지 내려가니 횡격막이 더 크게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몸의 안정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호흡이 흔들리지 않는 범위에서 뛰는 것, 그것이 바로 슬로우 러닝이 초보자에게도 안전한 이유였다. 그 설명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 운동의 방향을 이해했다. 빠르게 달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숨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에서 나만의 페이스를 찾아가는 과정. 그래서 코호흡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었다.


워낙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인 만큼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이 러닝을 할 때의 체온 관리였다. 특히 환절기 러닝은 체온 관리에 실패하면 건강한 사람도 바로 감기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옷장을 뒤져 요가나 캠핑을 할 때 입었던 옷 중 러닝용으로 괜찮을 것 같은 옷들을 찾아냈다. 흡습건성(땀을 빨리 흡수하고 빨리 마르는) 소재로 된 기능성 옷들이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바람막이나 겨울용 패딩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 중에서 골라냈다. 무지외반증을 가진 나에게는 신발도 큰 숙제였다. 새 운동화를 사려고 폭풍검색한 끝에 발볼이 넓어서 한국인이 제일 좋아한다는 뉴발란스에서 적당한 놈을 하나 골랐다.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넣기 위한 러닝 벨트까지 장만하니 이제 마음의 준비도 장비 준비도 모두 끝!


| 첫날, 농부복장으로 걷다, 뛰다, 걷다, 뛰다


처음으로 슬로우 러닝을 시작하던 날. 레깅스에 양말을 겉으로 내서 신고 허리에는 전대 같은 러닝벨트를 차고 나오니 영 어색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멋있어 보이던데 왜 나는 농부 같아 보일까? 집에서 나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호수공원 아니, 나의 '달리기 트랙'이다. 오늘부터 열심히 뛰어보자 생각하면서 저 멀리에 있는 횡단보도를 바라보는 순간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어제까지의 나였다면 다음 신호에 건너면 된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걸었을 테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는 뛰려고 나온 사람이 아닌가! 횡단보도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 숨을 고르며 다시 걷기 시작했고, 산책로에 들어서면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갈림길이 보이면 딱 저기까지만 뛰자, 마음속으로 목표를 정하고 뛰었고, 잠시 걷다가 호흡이 가라앉으면 다시 또 뛰면서 저 큰 은행나무까지 뛰자 생각하고 다시 뛰었다. 숨이 차면 걷고, 코호흡이 흐트러지면 멈추고, 다시 몸이 괜찮아지면 천천히 뛰고. 그렇게 나만의 박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막연하게나마 코호흡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된 것이 그날의 큰 소득이었다.


| 지금까지의 러닝일지


1회차 · 11월 12일

5.54km / 81분 / 평균 페이스 약 14’37”

걷다 뛰다, 쉬다 또 걷고. 거의 “산책에 약간 뛰기가 섞인” 느낌

1km를 16분…? 뛰었는지 안 뛰었는지 구분이 안 가는 속도

5km 구간이 21분대로 마무리된 걸 보면 걷기 비율이 확실히 높았던 날

교훈: 시작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성과. 그리고 코호흡의 중요성 실감


2회차 · 11월 13일

4.35km / 51분 / 평균 페이스 약 11’43”

전날보다 몸이 가볍고 숨도 덜 찬 느낌

1km 13분 → 2km 9분대 → 3km 10분대

전날과 비교하면 살짝 날아다닌 수준

후반부 체력이 조금 떨어져 4~4.35km는 페이스가 다시 늘어났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슬로우 러닝다운 리듬”이 잡히기 시작

교훈: 몸은 금방 기억한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


3회차 · 11월 16일

5.11km / 63분 / 평균 페이스 약 12’20”

세 번째 날부터는 초반부터 안정적인 속도가 유지되기 시작

1~3km 모두 10분대 초반

4km는 09’50”로 4회차 중 가장 빠른 기록

마지막 5km만 22분대인데 사실은 러닝 하다 말고 잠깐 동네 마트에 들름...ㅎㅎㅎ

교훈: 달리다 말고 다른데 빠지지 말자! 기록이 이상해지잖아!


4회차 · 11월 19일

5.28km / 56분 / 평균 페이스 약 10’36”

네 번 중 가장 많이 뛰었다고 느낀 날. 특히 마지막 구간에서도 뛰려고 노력한 나 자신 칭찬해!

전 구간이 9~10분대 → 페이스 변동 폭 최소

5km도 10분 초반으로 마무리

숨이 차는 느낌보다 “지속 가능한 속도”라는 감각이 더 강함

교훈: 몸이 준비되면 뛰는 게 덜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 시점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 네 번의 슬로우 러닝, 정리하자면?


네 번 뛰었을 뿐인데 기록은 생각보다 빨리 좋아지고 있다. 처음엔 평균 페이스가 1킬로에 14분대였다. 빠른 산책과 큰 차이가 없는 속도였지만, 이제는 10분대로 내려왔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느릴 수 있지만, 내 페이스 안에서는 굉장한 진보다. 특히 흥미로운 건 이 변화를 만들려고 애쓴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냥 숨이 편한 만큼만 뛰고, 코호흡이 무너지면 멈추고, 다시 괜찮아지면 천천히 달렸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걷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었고, 뛰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더 빨리, 더 멀리’가 아니라 “오늘은 이 정도면 괜찮아” 하며 가볍게 이어간 결과였다.


초반 1~3km에서 호흡 리듬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예전에는 1km만 지나도 ‘왜 벌써 이렇게 힘들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내 호흡과 발걸음이 맞춰지는 그 느낌이 조금씩 찾아온다. 후반부에 체력이 한 번에 무너지는 일도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3km를 넘기면 페이스가 와르르 무너졌다면, 이제는 종종 끝까지 일정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다. 몸이 바뀐 건지, 마음이 바뀐 건지 모르겠지만, 이 작은 변화들이 쌓이면서 마음속에서 작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아, 나도 뛸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앞으로의 목표는 심플하다. 욕심내지 않고, 지금처럼 천천히 이어가는 것. 페이스는 지금처럼 10~12분대면 충분하다. 주 2~3회 정도 천천히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고, 가끔은 컨디션이 좋을 때 6km나 6.5km까지 살짝 늘려보는 정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나와 내 몸이 함께 가는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이러다가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아이리쉬 탭댄스에도 도전하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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