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익선동에서 후배들을 만났다.
약속을 잡기까지는 작은 진통이 있었다. 종묘 근처 순라길에서 보자고 했지만 한 후배의 일정이 흔들리면서 일정과 장소를 확정하지 못했고, 겨우 날짜를 확정했을 때는 후보로 올라있던 장소의 예약이 쉽지 않았다. 결국 다 같이 폭풍 검색한 끝에 익선동의 한 이탈리안 식당을 선택했다.
익선동. 첫 이상이 좋지 않았던 동네다. 이후 몇 번 더 갈 일이 있었지만 반전은 없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좁은 골목을 걸을 때 부딪치는 낯선 사람들의 어깨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나는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에 민감한 편이다. 길을 걷다가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면,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심리적 안정감이 느껴지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눈치력을 발휘하곤 한다.
정면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감지되면 먼저 상대의 걷는 속도와 방향을 탐색한다. 상대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직진해 올 것 같으면 내 쪽에서 걷는 방향을 틀어 버린다. 상대방이 나를 의식해서 걷는 방향을 조금 바꾸어 주는 센스를 발휘해 주면 조금 덜 피하면서 서로 간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보일 경우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를 가로질러 가지 않고 잠시 기다려 주거나 다른 길로 돌아가 주는 배려와 비슷하다.
익선동에서는 이런 미세한 교감이 작동하지 않는다. 골목은 너무 좁고,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밀려오고, 승모근은 긴장한다. 한옥 건물이 고즈넉하고 예쁘면 무슨 소용인가. 그 아름다움을 느낄 틈도 없이 인해전술에 대응하는 전투태세가 되어야 하는 것을!
오전 11시 반, 종로 3가역 4번 출구를 나와 익선동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는 이미 다양한 인종의 발자국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안그래도 사람이 많은 골목인데 몇몇 가게 앞은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나의 걸음걸이는 마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 나왔던 주인공 멜빈 유달이 도로 블록의 틈선을 피하면서 걸었던 것과 비슷해진다. 나도 강박증인 것일까?
우리가 선택한 식당은 앤틱한 느낌의 레스토랑이었다. 맛집을 소개하는 요리 프로그램에도 나왔었고 화덕 피자로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예약했지만 음식 맛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커피에 진심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음식이 별로여도 커피가 맛있으면 어느 정도 용서를 하는 편인데, 커피 맛조차 애매하고 흐릿하다. 결국 오늘도 반전은 없었다.
후배 한 명이 다른 약속으로 먼저 떠나게 되면서 모임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말했다.
난 종묘에 들렀다 가야겠어!
감동적이지 않은 음식과 애매한 맛의 커피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의 긴장감을 씻어 내고 정화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종묘가 딱이다! 딱히 할 일이 없던 다른 후배가 나를 따라나섰다.
주말에 종묘에 간 적은 거의 없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은 것에 약간 놀랐지만 익선동을 지나온 뒤라면 그곳은 거의 고요에 가까웠다. 넓게 펼쳐진 공간에선 어깨를 부딪칠 일이 없다. 적당한 간격으로 사람들이 흩어져 있고, 소리의 결이 묘하게 낮다. 말소리도, 발걸음도, 바람도 한 톤씩 내려앉아 있었다.
옆에서 계속 자기가 그동안 갔던 ‘궁’ 얘기를 늘어놓는 후배의 조잘거림이 살짝 성가시게 느껴졌지만,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는 아량이 마음속에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