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오래 쓰는 편이다.
싫증이 나서 물건을 새로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 이상 작동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새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부터 블루투스 이어폰에 이상이 생겼다. 충전이 잘 안 되고, 완충 표시가 떠도 막상 써보면 금세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온다. 생각해보니 8년 정도 사용한 것 같다. 내장 배터리를 교체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이어폰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운동할 때, 산책할 때, 지하철로 이동할 때, 잠이 안 올 때, 남편이 보는 TV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유튜브 영상이나 오디오 콘텐츠를 듣곤 한다. 귀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뇌에 불필요한 자극이 가는 건 아닐까 가끔 걱정되지만,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시 분리된 나만의 공간으로 도망칠 수 있으니 나에게는 필수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용했던 것이 이번에 배터리 문제가 생긴 넥밴드형 블루투스 이어폰이다. 음질도 좋고, 착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편안하다. 커널형 이어폰도 함께 쓰고 있지만, 길을 걷다 갑자기 귀에서 빠져 굴러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늘 긴장하게 된다. 선이 없어서 편하긴 하지만 또 다른 불편함이 있으니, 동전의 양면 같다고나 할까.
일단 다음 주에 서비스센터에 방문해 볼 생각인데 배터리 교체가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챗GPT에게 물어보니 부품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배터리 교체 비용도 알려줬는데 만만치 않다. 비슷한 제품을 새로 살까 하고 검색해보고는 깜짝 놀랐다. 처음 샀을 때도 저렴한 편은 아니었지만 대략 10만 원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40만 원이 넘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만약을 대비해 유선 이어폰을 하나 사기로 결정했다. 집에 굴러다니는 유선 이어폰이 몇 개 있지만, 새로 바꾼 휴대폰은 C타입 이어폰만 사용할 수 있다. 어차피 막 쓸 거라 굳이 비싼 제품을 살 필요는 없겠다 싶던 차에, 동네 산책 중 마침 다이소가 보여 들어갔다.
5,000원. 정말 싸다. 이런 제품을 살 때는 늘 ‘잘못 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어서 포장지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 C타입, 갤럭시 S10 이하는 호환 안 됨, 그 외 대부분 기종 호환, 라디오 청취 불가 등등. 이 정도면 내 폰에서도 작동하겠지 싶어 무인결제 시스템에서 결제했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영수증을 깜빡한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괜찮겠지 하고 넘어갔다.
집에 오자마자 포장을 뜯어 이어폰을 꺼낸 후 휴대폰에 꽂고 테스트해보았다. 휴대폰에서는 분명히 이어폰을 인식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블루투스를 꺼봤고 볼륨도 확인해봤지만 계속 들리지 않았다. 영수증도 없고 포장 박스도 이미 찢어놓은 상태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다이소에서 휴대폰용 C타입 이어폰을 샀는데 소리가 안 들려. 뭘 점검해야 할까?” 챗GPT는 여러 가능성을 나열하더니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다이소 C타입 이어폰 대부분은 ‘DAC 미지원 패시브형’이라
삼성 갤럭시에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리가 안 나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매우 흔하다’는 말에서, 내가 바보라서 잘못 산 게 아니라는 위안이 들었다. 혹시 몰라 제품 바코드를 촬영해 업로드하고 DAC 내장 여부를 다시 물었다.
이 제품은 삼성 갤럭시 S 시리즈 / A 시리즈에서 작동하지 않는 제품입니다.
제품 자체 불량이 아니라 스마트폰 구조와 맞지 않는 이어폰이에요.
화가 났다. 아무리 아이폰 세상이라지만, 국민 구멍가게 다이소에서 갤럭시 S/A 시리즈에서 작동하지 않는 이어폰을 팔아도 되는 건가? 처음에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나를 탓했지만, 이쯤 되니 반드시 환불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불타올랐다. 챗GPT에게 반품 가능 여부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 갤럭시 미호환 문제는 흔해 반품 사유로 인정됨
✔ 영수증 또는 카드 내역 있으면 14일 이내 환불 가능
✔ 패키지가 조금 훼손되어도 문제 없음
다시 외투를 챙겨 입고 모자를 눌러쓴 뒤, 씩씩거리며 다이소로 향했다. 영수증도 없고 포장도 찢어져 있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이는 단순 변심이 아니라 ‘제품 사양 안내 미흡’이라는 정당한 반품 사유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까지 했다.
가게를 들어서며 직원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 40대 아주머니다. ‘음… 쉽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나의 편견일까?) 마음을 다잡고 내 차례가 되자 단호하게 말했다. “소리가 안 들려요. 반품해 주세요.” 직원은 빠르게 상자를 열어 이어폰을 꺼내더니 자신의 휴대폰에 꽂아 테스트해보며 말했다. “들리는데요?”
“네??? 제가 찾아보고 왔는데요, 기종에 따라 다르대요. 폰에 DAC가 내장돼 있지 않으면 이어폰에 그게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내용이 포장에 전혀 쓰여 있지 않아서 몰랐거든요. 제 폰으로도 한번 테스트해보세요.” 직원이 내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들어보더니 말했다. “잘 들리는데요?”
내가 들어봐도 잘 들린다. 이게 무슨 일인가. 직원이 “DAC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봐요”라고 말하는데, 차마 챗GPT에서 본 내용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신흥 종교 교주를 맹신하는 광신도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쓱해져 “어머, 정말 다행이에요”라는 말만 하고, 마치 ‘이제 다시는 반품하러 오지 않겠습니다’라는 표시라도 하듯 직원이 보는 앞에서 포장 박스를 휴지통에 넣고 서둘러 다이소를 나왔다.
집에 와서 다시 살펴보니, 문제는 볼륨 버튼에 있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블루투스 이어폰은 휴대폰에서 볼륨을 조절하면 이어폰 볼륨도 함께 조절되었는데(이게 당연한 것 아닌가?), 다이소 이어폰은 이어폰 자체에 달린 볼륨 버튼으로만 조절되는 방식이었다. 집에서 처음 테스트했을 때 이어폰 볼륨이 ‘0’이었고, 나는 휴대폰 볼륨만 확인했기 때문에 소리가 안 들린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챗GPT는 처음부터 “이런 경우가 매우 흔하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그래서 반품도 쉽게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확신을 했을까? 다시 한번 느낀다.
믿으니까 쓰지만,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너. 챗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