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한 재능들을 모아 일상의 기쁨을 조립하는 사치
[매거진 : 가난한 프리랜서의 소심한 사치생활]
재주 많은 사람이 끼니를 굶는다.
어린 시절 재주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은 무엇이든 중간 이상은 해내는 펀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공부도 대충 상위권이었고, 사생대회나 백일장에 나가면 심심치 않게 상장을 받아왔다. 노래도 곧잘 불렀다. 그저 위아래로 팔을 휘젓는 수준이었지만 반 아이들의 합창을 이끄는 지휘자로 선발되기도 했다(선생님이 왜 나를 택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어릴 때는 그저 그랬던 운동신경이 느즈막히 직장 생활 체육대회 때 폭발해서 탁구며 배구며 종목을 가리지 않고 코트를 누벼 동료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열 살 때쯤이었을까. 넉넉지 않은 살림에 엄마가 큰맘 먹고 선물해 준 마론 인형은 내가 가진 재주 중 특히 '손재주'를 봉인해제시켰다.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자식들에게 입힐 옷 한 벌 사주는 것도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집안 형편임을 눈치챌 수는 있는 나이였으니, 인형에게 입힐 옷을 사달라고 조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패리스 힐튼 급 외모와는 전혀 안어울리는 배냇저고리같은 옷을 인형에게 계속 걸쳐 두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옷감을 구해 달라고 졸랐고, 엄마는 동네 수선집에서 자투리 천을 얻어다 주셨다.
엄마가 가지고 온 꽃무늬 폴리에스테르나 빳빳한 모직 조각을 마름질하고 바느질하면서 인형 옷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스스로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내가 만든 인형 옷은 내가 보기에도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부잣집 아이들이 문방구에서 비싸게 주고 산 옷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작품'이었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바느질을 하던 그 시절 나의 집중력은 퀴리 부인이 책을 읽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졌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옷을 하나씩 완성해 갈 때마다 느꼈던 성취감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거창한 꿈을 꾸게 만들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 평소 자식들과 대화가 많지 않았던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넌 커서 뭘 하고 싶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내뱉고야 말았다. "디자이너요." 딸의 입에서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나오자, 평생 6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안정된 고정 수입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 "그런 걸 해서 어떻게 먹고살래!"
1시간 넘게 무릎 꿇은 채 꾸지람을 듣던 나는 그저 서러웠고, 저린 다리를 질질 끌며 방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내 다리가 아니라 내 미래가 마비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옳았던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는 내가 평생을 노력해도 닿지 못할 '미적 안목의 층위'가 존재하고 있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는데 어쩌면 아버지는 그걸 알면서도 차마 입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들었던 후배 누나 이야기다. 후배의 누나는 건설회사 직원이었는데 어느 날 회사 사장의 딸이 낙하산으로 입사했고 당연히 직원 모두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낙하산인 데다 전공자도 아니니 일이나 제대로 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는 벽지의 미세한 질감 차이로 공간의 격을 논하고, 조명의 조도만으로 그 장소의 주인이 가진 취향의 깊이를 가늠하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낙하산으로 입사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얄미웠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전 세계의 최고급 호텔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이름난 건축물을 보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 결과 그녀에게는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다. 피나는 공부나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마치 매일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체득된 태생적인 감각, 소위 ‘아비투스(Habitus)’를 갖게 된 것이다. 알고 나서 보니 더 얄밉다.
타고난 재능을 마주했을 때도 그렇지만, 환경적인 혜택까지 더해진 압도적인 안목과 재능을 마주하게 되면 평범한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잔바리 손재주를 믿고 죽을 듯이 노력해서 디자이너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인형 옷을 만들 때의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저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매월 나오는 마약 같은 월급으로 위로받는 어깨 쳐진 월급쟁이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속 살리에리의 절규도 가끔 생각난다. "신이시여, 왜 나에게는 열망만 주고 재능은 주지 않으셨나요?”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모차르트를 생각하면 살리에리가 가진 음악에 대한 열망은 차라리 형벌이었을 것이다. 재능이 없을 바에야 열망조차 없는 편이 덜 괴로웠을 그의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살리에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잔바리 손재주도 가끔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니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맨바닥에서 새로운 경력을 고민해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느질이었다. 인형 옷을 만들 때의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고자 집 안의 천 쪼가리를 모아 바느질을 해 봤지만, 고양이 장난감 수납 주머니 하나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때 바로 알았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꾸지람 때문에 꿈을 일찍 접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동안 비밀이었는데 나는 뮤지컬 가수를 꿈꿨던 적도 있다. 노래는 곧잘 했어도 몸치에 가까웠던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뮤지컬 배우의 꿈은 비밀로 간직된 채 조용히 사라져 주었으니 참 다행스럽다.
어린 시절 나를 좌절하게 했던 ‘어중간한 재능’들은 지금의 내 일상을 기쁨으로 채워 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화려한 공간의 미립자 속에서 만들어진 ‘유산’이라면, 나의 아비투스는 조금씩 맛보았던 예술과 실패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발굴품’이다. 비록 전문 디자이너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미술관의 그림 한 점을 볼 때 해설가 없이도 그 색채 속에 푹 빠져 무아지경을 경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뮤지컬 배우는 되지 못했어도, 지휘자의 섬세한 해석 차이를 알아채며 내 일의 리듬에 맞는 배경음악을 고를 줄 아는 귀를 갖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오막살이 같은 좁은 집 한쪽 벽에 내 마음을 건드리는 그림 몇 점을 걸어두고, 좋아하는 지휘자가 연주하는 곡을 틀어놓는다. 타고난 감각과 환경이 주는 압도적인 안목이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얕은 재능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소소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재능이 부족해서 꿈은 접었을지언정, 그 꿈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가난한 프리랜서에게 이보다 더 든든한 사치가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가 가졌던 그 작고 얕은 재능들을 가장 먼저 발견해 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꿈을 반대했던 아버지였다. 칭찬에 인색했던 가난한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어린 막내딸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작고 하얀 악기를 내미셨다. "너는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이거라도 쳐보렴." 아버지가 고심해서 사주신 것은 '야마하' 멜로디온이었다. 그것은 가난한 집안에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생애 첫 번째 사치이자, 나의 서툰 재능을 향한 아버지의 가장 따뜻한 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