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의 기술, 비움의 기술

코치들이여, 입을 닫고 귀를 열어라.

by Helen

유튜브의 지식 콘텐츠를 보다 보면 재미는 있는데 끝난 뒤 남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왠지 모르게 숨 가쁜 기분만 든다. 알아보니 원인은 '점프 컷(Jump Cut)'이다. 영상 편집 시 말과 말 사이, 불필요한 Pause가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 앞뒤 영상을 바로 붙이는 기법인데 이런 작업을 자동으로 해주는 소프트웨어도 있다고 한다.


역동성을 높여 조회수를 낚기엔 제격일지 몰라도, 부작용이 크다. 보는 이에게 쉬엄쉬엄 생각할 멈춤의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1초의 정적도 허용하지 않는 속도감은 시청자의 눈을 붙들고 귀를 홀리지만, 뇌가 정보를 소화할 틈은 주지 않는다. 당장의 조회수를 위해 뇌의 과부하를 방치하는 셈이다. 유튜브는 시청자의 내용 이해도나 학습 성취도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Pause의 개념을 처음 접한 건 신입사원 시절 일본에서 받은 '다이내믹 프레젠테이션 스킬' 교육에서였다. 당시 백지상태였던 나는 이틀간의 교육내용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HRD 전문가로서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그 교육의 영향이 아주 컸다. 당시 강사는 설득력 있게 말하기 위한 다양한 기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Pause를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말하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했던 교육에서 말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했다. 하지만 HRDer로서, 그리고 코치로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확신한다. 진짜 고수는 말을 잘하는 기술을 넘어서서 말을 끊고 침묵하는 시간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짧은 정적은 청중의 마음속에 '블랙박스'를 만든다.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 찼던 공간에 순간적인 정적이 흐르면 쏟아지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자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들은 내용을 잠시 붙잡을 여유를 갖게 된 청중은 발표자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 검토하며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가끔 프레젠테이션 스킬 강의를 할 때, 말이 빠른 게 고민인 이들이 있으면 나는 말의 속도를 늦추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타고난 말투를 역방향으로 고치려는 노력 대신 Puase를 활용하는 쪽으로 노력해 보라고 조언한다. 말이 빨라도 적절한 쉼표(호흡)만 있다면 오히려 자신감 넘치는 전문가로 비친다. 침묵은 말의 신뢰도를 높이는 가장 저렴하고 강력한 장치다.


느지막이 코칭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코칭에서도 Pause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코칭은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프레젠테이션과는 꽤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인데, 두 스킬 모두 Pause를 필요로 하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코치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코칭의 핵심은 고객 안에 숨은 잠재력을 끌어올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코치의 말이 길거나 복잡하면 고객은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고 코치에게 의존하게 된다. 많은 초보 코치가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다 보니 질문은 복잡해지고 길어지다가 때로는 주어와 서술어가 따로 놀기도 한다.


고객이 못 알아들을까 봐 친절한 미사여구를 잔뜩 붙여 질문하면, 정작 고객이 "질문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되묻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질문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이때 고객은 잠재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질문도 이해 못 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한다. 그래서 코칭 질문은 직설적이고 담백해야 한다.


질문이 '채움의 기술'이라면, 침묵을 견디는 것은 '비움의 기술'이다. 얼마 전 KPC(Korea Professional Coach) 자격증을 준비하는 이의 코칭실습 장면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살짝 미안하지만, 그분은 마치 '질문하는 챗봇'같았다. 몇 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Puase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고객이 답을 하면 탁구공을 받아치는 듯한 속도로 바로 다음 질문을 날리는 것이 그분의 특기였다.


코치가 숨 쉴 틈 없이 질문을 쏟아내면 고객도 답을 길게 하지 않게 되고, 결국 대화는 숨 가쁜 탁구 경기처럼 변한다. 얼핏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대화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기기 바쁜 폭탄 돌리기처럼 보인다. '점프 컷(Jump Cut)'기법을 사용한 유튜브 콘텐츠와도 비슷하다.


고객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쉴 틈 없이 다음 질문을 잇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고객이 하는 이야기의 첫머리만 듣고 나서 바로 다음 질문을 준비하느라 정작 나머지 이야기는 귓등으로 흘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말을 끝까지 듣고 몇 호흡 쉰 뒤에 다음 질문을 이어가도 결코 늦지 않다. 침묵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모양이지만, 그 인내의 끝에 진짜 통찰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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