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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29. 2024

소소일상 ep.10

<딸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딸에게


 엄마는 네가 처음 혼자서 버스를 탔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단다.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정반대 방향에서 타는 바람에 꽤나 먼 바닷가까지 갔더랬지! 잔뜩 겁을 먹고 낯선 곳에서 기다리던 너를 태워 오던 길에 우리 둘이 한참을 웃었던 그날. 그게 4년 전쯤이었을까? 지난  주말 친구들과 삼천포에 다녀왔다는 너의 얘기를 듣고 엄마는 깜짝 놀랐단다. 주말 새벽부터 마을버스와 시외버스를 번갈아 타고 3시간이 넘는 여정 끝에 남해를 구경하고 고깃집에 들어가 밥도 사 먹었다는 고등학교 1학년, 3명의 여자친구들. 어쩜 그리도 멋있던지!


 돌이켜보니 엄마도 너만 한 나이엔 친구들과 함께라면 늘 더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 가족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 다른 든든함과 안정감을 친구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었어. 아직 완전하지 않던 우리가 비슷한 혼란의 시간을 함께 견디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연대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서로를 가장 완벽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었던, 혹은 적어도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싶었던 시기였을 거야. 지금 엄마의 나이에 와선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인 거지. 그래서 엄마는 너희들의 우정을 열렬히 응원한다.

 

 어른이 되면서 내 세계를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더구나. 내가 관계 맺는 것들이 하나둘 늘다 보면 나의 역할과 모습이 무수해지거든. ‘00의 딸, 00의 배우자, 00의 며느리, 00의 엄마, 00 직장의 직원...’처럼 나를 정의하는 수식들이 늘어나고 가끔은 그 안에서 내가 익사할 것 같은 순간들을 마주하기도 했어. 그러는 사이, 나란 세계에 남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도 만들게 되었지. 가끔은 몰래 웅크리고 숨을 고를 수 있는 나만의 방. 그런 방이 생기고 나니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하지만 그게 슬픈 일은 아닌 것 같아. 그 작은 방에 오롯이 나만을 위한 에너지를 조금씩 채워갔더니 다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거든.


 이제 엄마는 또 다른 우정을 경험하고 있어. 함께 축구를 하는 친구가 여유 있게 샀다며 나누어 신자고 내민 양말 속에서, 독서 모임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다 터져버린 공감의 눈물 속에서, 장을 보다 떠오른 채식주의자 친구 생각에 하나 더 집어 든 야채 꾸러미에서, 아직 어린 아기와 함께 모임에 온 친구를 위해 아기를 받아 안는 그 손길 속에서 엄마는 그렇게 매일매일 우정을 발견한단다. 측은함에서 오는 동정이 아니라 나도 그런 시절을 겪어봐서 아는 공감과 이해에서 우러나오는 자매애, 그것이 요즘 엄마가 느끼고 사는 우정이야.

딸아! 엄마는 너의 시절에 찾아올 또 다른 우정을 생각하면 벌써 설레는구나. 그러니 너에게도 우정이 변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너무 애쓰지 말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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