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맛의 고장’ 전주에서 나고 그곳에서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자랐다. 내가 기억하는 전주 사람들은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애나 어른이나 할 거 없이 마주치기만 하면 늘 안부 인사는 “밥은 먹었는가?”이었다. 먹었다는 대답에는 무얼 먹었는지를 궁금해했고, 대답하는 이들도 신이 나서 진지하게 답을 해주었다. 반면에 아직이라는 대답에는 슬픈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안타까워하면 혀를 찼다.
나의 부모님은 오랜 기간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집에 놀러 온 내 친구, 혹은 그 친구를 데리러 온 그들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밥때가 되었을 무렵, 집에 배달 온 각종 배달부 및 집배원, 드물게는 순찰 온 경찰관 아저씨나 물 한 잔 얻어 마시거나 길을 물으러 온 어르신까지도 식전이라면 내 어머니는 그냥 보내는 일이 없었다. 이미 펴 놓은 밥상에 급히 수저 한 벌을 더 올리고 다 같이 끼어 앉아 밥을 먹는 건 흔한 일이었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친구 집에 놀러 가서도 식사 때가 되면 대부분의 친구 부모님은 당연하게 밥상에 수저 한 벌을 더 놓아주셨다.
예사롭지 않은 손맛에, 정갈하기까지 하셨다는 외할머니 덕분에 우리 엄마와 이모, 삼촌들은 엄청난 미식가로 자랐다. 각종 먹자 계를 결성해서 철마다 팔도를 함께 다니며 그 지역 맛집을 탐방했던 그들은 요샛말로 하면 매우 열정적인 푸디(foodie)였다. 음식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나중에는 이웃 나라까지도 하나둘 섭렵해 갔다. 그렇게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서 맛본 음식을 분석해서 각자 집에서 열심히 재현하기도 했다. 젖먹이 때부터 그들의 먹부림 여행에 늘 동행하고 흔치 않은 외국 음식까지도 틈틈이 맛보며 자란 덕분에 나는 가리는 음식이 없고, 낯설고 새로운 음식도 잘 먹는 어른이 되었다.
나만의 소울푸드는? 한참을 생각해도 딱 떠오르는 음식이 없어서 적잖게 당황했다. 최고의 추억 속 음식이라도 생각해 보려는데 역시 이거다 싶은 것이 없다. 왜? 나처럼 잘 먹는 사람한테?
내게는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게 중요하다. 라면 한 봉지를 끓여도 옆에서 “나 한 젓가락만!” 하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라면이 그렇게 맛있다. 내가 혼밥을 즐기지 못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간절하게 먹고 싶던 음식이나, 제아무리 귀한 식재료로 근사한 요리를 해놓아도 혼자 먹으려 치면 그 맛이, 그 신명이 나질 않는다.
어린 시절, 좀처럼 그 맛을 이해하지 못하던 가지나물이 요즘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젊었던 나의 엄마가 가지를 무척 좋아하셨다. 먹기가 싫어서 가지 반찬을 밥상 한편에 밀어두면 이렇게 맛난 걸 왜 먹지 않느냐며 보란 듯이 입에 가득 넣고 맛있게 드시던 엄마 얼굴이 이젠 내 얼굴에 겹쳐 보인다. 우동을 먹고 싶다는 어린 두 딸에게 ‘우동은 고속도로 휴게소가 진리’라며 주저 없이 차에 태워 내달리던 엄마는 내게 음식은 사람이고 마음이라는 걸 가르쳐주신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