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 채널을 돌리다가 한 초등학생이 케이팝에 맞춰 능숙하게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진행자가 감탄하며 동반 출현을 한 다른 아이에게 함께 방송 댄스를 배우는지 물었고, 그 친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가 ‘방송 댄스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좀 전까지 행복하게 춤을 췄던 다른 아이가 매우 당황해했는데 그 장면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방송 댄스가 쓸모없다는 것은 아이 엄마의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평가였지만 그 아이 역시 수긍하고, 방송 댄스를 배우는 일을 자신의 선택사항에서 영원히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살아오면서 무용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열망과 욕구를 스스로 덜어내고, 또 나의 쓸모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몰아세웠는지가 문득 떠올랐다. 대게는 내가 어려서 더 유용가치가 있는 것을 부모의 기준으로 배웠고, 학생일 때는 미래에 더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선생님이 골라주었다. 여자였기 때문에 여자답지 못한 것과 애초에 남자의 몫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은 쓸모없다고 세상이 부지런히 나를 가르쳐주었다. 어른이 되었을 땐 이미 수많은 타자의 기준이 뒤엉켜서 어느 것을 내가 정말 쓸모 있다고 여기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였다. 당연히 모유를 먹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출산 후 며칠이 지나도 젖이 돌지 않았다. 모유가 신생아에게 영양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모유 대신 분유를 먹인다는 게 죄스럽기까지 했다. 찔끔찔끔 나오는 젖을 빨다 배가 고파 우는 아기를 보면서 내 자식 하나 먹일 모유조차 나오지 않는 내가 정말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해 자신을 무용하다고 판단해 버린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나는 아기를 안고 출산 3주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인데도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엄마로서 두 아이를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육아와 살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몸이 괴롭고 마음이 지쳐서 힘들었지만 늘 머릿속으로는 어떤 순서로 일하면 더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유용한 것으로만 꽉꽉 채워 담으려 애썼던 그 시간 속의 나는 절대 행복할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의 삶은 세상이 요구하는 쓸모 있음을 쫓느라 나의 것처럼 고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러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했다. 이미 하던 일들도 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동기로 접근하고, 나의 욕구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을 하나둘 시작했다. 왜인지 모를 죄의식이 불쑥불쑥 끼어들 때도 있었지만 늘 다른 사람을 위해 갈아 넣기만 했던 나 자신이 서서히 채워지는 걸 느꼈다.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 사이의 균형이 생기자 나는 다시 행복해졌다.
돌이켜보니 쓸모없는 일은 없었다. ‘수억 버는 일도 아니면서 애나 잘 키우지!’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버텨낸 시간 속에서 나의 아이들은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목격하며 자라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버겁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페미니즘 글모임 속에서 나는 좀 더 용기 있는 어른이 되었다. 출산 후 부기도 빠지지 않은 몸으로 다시 수업을 나갈 때 내 무릎에 앉아 놀던 첫아이는 곧 성인이 되고 둘째 아이는 곧 중학교를 졸업한다.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공부만 하기도 빠듯한 요즘, 큰아이는 120km를 걸어 제주도를 종주했다. 가구디자이너가 꿈인 녀석은 나무를 만지고 다듬는 일을 가장 행복하고 값진 일이라 꼽는다. 작은 아이는 축구공을 차는 순간에 심장이 뛰고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말한다. 여자아이에게 축구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 내 아이는 필드 위에서 우정과 연대의 힘을 경험하고, 편견을 깨는 용기를 배우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 내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일은 타인의 기준에 맞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가 아닌 ‘나답게’ 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을 가는** 나의 두 딸을 응원하는 일일 것이다.
* 『돌이켜 보면 무용한 것은 유용한 것과는 다른 결의 값어치가 있었다. 나라는 인간이 세상을 지탱하는 쓸모 있는 기둥임을 알려준 게 유용이라면, 나라는 인간이 나로서 그저 존재한다고, 그거면 됐다고 담담히 일러주는 건 무용이었다.』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p.172/ 이성진 에세이]
**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하네
아름다운 꿈 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꿈꾸지 않으면/ 간디학교 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