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일상 ep.2
우리 이제 그만 미안해하기로 해요.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직면하고 있던 감정적인 혼란이 나의 원가족 문제에서 비롯하였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특히, 지금이라도 내가 나의 엄마로부터 정서적 독립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단순히 ‘애증 관계’라고 얘기할 수 없던 나와 엄마의 관계. 배우자로서 믿음을 주지 못했던 남편 탓에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 그의 무능함으로 생계까지 홀로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삶은 오래도록 고단했다. 두 딸 중 첫째와는 전생에 원수지간이라도 되었는지 늘 애써도 서로 상처만 주고받으며 자신은 ‘남편복에, 자식 복도 없는 박복한 여자’라며 목놓아 울던 엄마를 나는 어려서부터 가엽게 여겼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불행한 삶을 막내딸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안받길 바라며 스스로 채운 ‘착한 딸’이란 족쇄 속에서 갇혀버렸다. 내가 커갈수록 나를 향한 엄마의 표정과 말은 나를 더 무겁게 짓눌렀고 의지할 곳 없는 엄마에게 내어주던 작고 여린 어깨는 영영 자라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지나온 어른의 시간, 누군가의 배우자, 또는 엄마로 살아온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는 더 열심히 그녀의 삶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아팠다. 그렇게 나는 마흔이 다 되어 엄마에게 정서적 독립을 선언했다. 더 이상 엄마와 딸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각자의 삶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두 사람 다 힘겹게 받아들였다. 엄마는 딸로서 보호받지 못했던 나의 유년 시절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사실 더 많은 책임은 나의 아버지에게 있었지만 이미 돌아가셨기에 사과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서적 독립을 하고도 여전히 내 안에는 해소되지 못한 무수한 감정과 해석되지 못한 과거의 경험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쫓아 되짚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엄마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좀 더 깊은 이해와 용서가 가능해졌다.
신발에 관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다. 엄마가 골라준 후보 신발들을 어린 내가 신어보고 있는데, 가게 점원이 마네킹 발 같은 것이 달린 제골기를 보여주며 가죽 신발의 품을 늘려줄 수 있다고 설명했던 것 같다. 한 계절만 지나면 발이 자라고, 걷기보단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대여섯 살 남짓의 아이에게 가죽 수제화를 사주었던 나의 엄마. 늘 있던 일이 아니어서 이유가 궁금해졌다. 30년도 더 넘은 일을 엄마는 금세 기억해 냈다. 특별한 가족행사에 가야 했거나 느닷없이 어린 내가 가죽 신발을 사달라 졸랐던 건 아닐까 예상했지만, 엄마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당시에 음식점을 운영했던 엄마는 늘 피로한 상태였는데 유난히 몸이 좋지 않아 영양주사나 처방받을까 싶어 병원에 갔다가 덜컥 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엄마는 그 암 진단이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고 기억했다. 결혼 이래로 한 직장에 3개월 이상 붙어있질 못했던 게으른 남편에게 두 어린 딸을 남기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려 꼭 새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크게 키워놓은 음식점과 그간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 남편의 재혼이 어렵지 않으리라 믿었다. 두 딸이 배곯을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다만 제대로 된 옷과 신발을 사입히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었단다. 행여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라도 당해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 것이 두려워(이러한 두려움은 분명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엄마 자신의 경험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나와 언니를 데리고 다니며 옷과 신발을 사재기했다. 수술하러 가는 날까지 사 모은 것으로 몇 년은 쇼핑 없이 우리를 기를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함께 웃지 못했다. 어째서 나는 엄마가 암에 걸린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태 알지 못했을까. 엄마는 어린 딸들에게 그 사실을 열심히 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원과 수술, 퇴원, 그리고 이후의 치료과정 내내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견뎌야 했던 엄마의 시간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 시절, 한결같이 다방과 당구장을 쏘다니며 방탕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갓 지은 밥을 대접받으면서도 늘 반찬투정을 빠트리지 않았던 아버지를 기억하기 때문에 엄마의 그 시간이 더욱더 서글펐다.
엄마가 음식점을 그만둔 것은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젊어서 대박 난 밥집 사장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친정엄마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손맛 덕분이라고 엄마는 말하지만, 그녀의 부지런함과 억척스러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자리에서 200명분의 식사를 거뜬히 준비할 만큼 능숙했던 일이었는데 일을 그만두고 당신만을 위해 차리는 밥상은 늘 소박하다. 집에 놀러 온 친구분을 위해 내놓는 상이나 딸들 집에 와 직접 차려주는 밥상과는 차이가 크다. 한 번쯤은 딸이 차려주는 밥상을 기껍게 받아도 좋을 텐데 엄마는 늘 그러질 못한다. 이미 밥상이 차려진 걸 보고도 부엌으로 달려와 당신 손으로 반찬 몇 개를 더해 상에 올려야만 비로소 식탁에 앉는다. 처음 몇 번은 내가 만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그러나 싶어 좀 더 신경을 쓰고 메뉴도 바꿔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가 스테이크를 굽거나 파스타를 만들어도 엄마는 늘 나의 부엌 한 켠에서 평소 내가 좋아하는 다른 것을 만들었다. 나의 요리로는 절대 엄마를 감동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서운했고 이후 나는 엄마를 위해 요리하는 일을 영영 포기했다.
명절은 대부분 엄마와 함께 보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지난 명절에도 엄마는 먼 길을 오면서도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 재료를 상자째 챙겨 오셨다.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직접 농사를 짓는 것도 아녀서 결국 다 사 온 것들인데 우리 네 식구에겐 넘치는 양이라 넣어둘 곳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엄마는 연휴 내내 나의 부엌을 점령하고 음식을 했다. 그날 먹을 것뿐 아니라 두고 먹을 각종 밑반찬과 간편 요리까지, 안 그래도 터질듯한 냉장고에 꽉꽉 채워놓았다. 부엌에 종일 서 있는 엄마가 곧 불편해졌다.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끝도 없이 만드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나는 쉽사리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도 없다. 결국 나는 연휴 이틀 만에 탈이 나고 말았다. 꾸역꾸역 먹어댄 음식이 명치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아팠다. 그런 딸에게 먹일 죽을 끓이겠다고 늦은 밤 또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엄마를 만류하려는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걸 눈치챈 엄마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내 등을 쓸어주었다. 소화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음식물과 나의 감정들까지 모두 쓸어내려는 것처럼. 그러다 엄마는 말했다. “미안해.” 남을 먹이느라 바빠서 정작 어린 딸은 남의 손에 맡겨놓고 이유식 한번 직접 떠먹이질 못했다고. 한창 예민할 나이엔 부모의 이혼으로 외로운 밥상을 마주하게 했고, 하필 첫 손녀가 태어났을 땐 하던 일에 문제가 생겨 산후조리 하는 나에게 미역국조차 끓여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엄마는 혼잣말처럼 사과했다. 엄마에게는 단순히 딸을 ‘먹이는 일’이 아니었다.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을 당신의 방식으로 조금씩 갚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