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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15. 2024

소소일상 ep.1

어느 극 내향인의 육박독아스러운 날들

     격주마다 오래된 독서 모임의 멤버들과 배드민턴을 쳐온 게 만으로 2년이 다 되었다. 우리끼리 재미로 이어온 것이라 크게 운동이 될까 싶지만, 올해 들어 멤버들의 실력향상이 눈에 띄었다. 다른 운동을 겸하면서 체력이 좋아진 덕에 배드민턴 실력이 좋아진 사람도 있었고, 주민체육 시설에서 배드민턴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했거나 실력자 지인에게 개인지도를 받는다는 이도 있었다. 라켓 잡는 법도 제각각일 만큼 아는 게 하나도 없던 동네민턴에서 단식, 복식 규칙을 배워서 적용하고 서브 넣는 법이나 힘의 완급조절까지 이곳저곳에서 전수받은 팁을 공유하고 나니 확실히 그럴듯해 보이는 배드민턴이 되었다. 곧 멤버들이 슬금슬금 장비까지 제대로 갖추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레슨 때 필요해서 구입했다며 배드민턴 전용화를 챙겨 왔고, 더 이상 초급자용이 아닌 값비싼 라켓까지 장만했다. 쿠팡에서 구입한 4개에 3만 원 하는 라켓을 들고 어디든 끌고 다니는 낡은 운동화를 장착한 나는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몇 번 배드민턴용품 사이트에 들어가 그 세상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슬쩍 염탐해 본 적이 있지만 무지한 내가 선뜻 구입하기에는 종류가 너무도 다양하고 가격대도 천차만별이라 늘 구경으로만 끝나곤 했다.


   꽤 오랫동안 배드민턴을 쳐온 지인이 하나 있다. 동호회에 소속되어 부부가 같이 운동한다고 들었는데 개인 SNS를 통해 올리는 운동 사진 속의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좋아요’를 누르고 넘어가는 게 보통인데, 배드민턴의 매력을 줄줄이 써 올린 지난 포스트에는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댓글을 남겼다.

 - 배드민턴을 제대로 배우고 치면 더 재미있을까요?

곧 그녀의 대댓글이 달렸고, 우리 동네 체육관에서 진행되는 배드민턴 레슨에 관한 정보도 함께 쓰여있었다. 그곳에서 배드민턴 강좌가 진행된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았는데 등록 경쟁이 치열하다는 소문에 자세한 내용을 찾아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마침 오전 시간도 비어있고, 수업료도 저렴하길래 곧바로 수강을 결심했다. 배우고 나면 제대로 된 장비를 장만해야겠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등록하고 나서야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소문처럼 등록 경쟁이 염려되어 수강 신청 첫날,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끌고 체육관에 당도했는데 등록창구가 너무도 한산했다. 의아했지만 어쨌든 마음먹은 대로 수강 신청을 할 수 있어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구의 수업이냐에 따라 경쟁률이 확연히 달랐다. 분기마다 아이돌 콘서트 피케팅을 방불케 하는 수강 신청 마감 2분 컷의 신화를 이루는 스타강사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를 가르칠 사람이 인기 절정의 강사가 아니라는 점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본래가 사람 많은 곳이 부담스러운 내향인인 나로서는 수업 시간이 붐빌 염려가 없으니 되려 고마운 상황이었다. 또 하나! 수업 방식이 개인레슨이라는 점이다. 수강생 전부 한 번에 수업을 받는 단체수업을 기대했는데 10분짜리 1대 1 수업이었다. 수강생의 수준이 똑같을 순 없으니 그 이유는 이해되었지만 수업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딱 10분짜리의 수업을 주 2회 듣는다고 얼마나 실력이 향상될까 싶었지만 처음 보는 강사에게 수강 취소사유를 직접 설명하고 환불받는 지난한 과정을 떠올려보니 그냥 듣는 게 낫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구입한 만 원짜리 가방과 그럭저럭 쓸만한 중고 라켓을 들고서 첫 수업에 나갔다.

   

  체육관 도착 시간을 기준으로 선착순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늘 첫 순서를 노렸다.  이른 시간인 만큼 수업 초반에는 주로 나와 강사뿐일 때가 많았다. 반듯하게 그려진 코트에서 셔틀콕이 팽팽하게 튕기는 소리와 바닥을 스치며 내는 마찰음이 그 거대한 체육관을 가득 채울 때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았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다부진 몸과 부리한 눈매를 가진 강사는 목소리도 달달했다. 훈남이 가르치는 수업인데 왜 이리 한산할까 싶었을 무렵,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전면 해지되었고 나는 그 이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강사의 설명과 시범을 따라 셔틀콕을 치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갔지만, 어김없이 땀범벅이 되었다. 셔틀콕 정리까지 끝낼 즈음이면 체육관이 반쯤 차는데 수강생보다는 동호회 소속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한 코트씩 사이를 두고 유별하며 앉는 걸 봐서는 동호회가 여럿인 게 분명하고 각 코너에는 동호회별로 선점해 놓은 테이블 위에 늘 경쟁하듯 각종 음료와 간식거리까지 화려하게 차려져 있었다. 코트 가장자리에는 사람 수보다 많은 의자가 열을 맞춰 놓이는데 아무래도 뒤늦게 올 회원을 위해 자리 선점을 하는 것일 테다. 출입문까지 체육관을 빙 둘러 나가다 보면 동호회 간의 긴장된 공기가 내게도 느껴질 정도다. 어디선가 생활체육 종목 중에서도 배드민턴이 서열 관계와 텃세가 유독 심하다고 들었는데, 체육관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그 얘기가 아주 거짓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내 수업의 반이 지날 무렵 나타나는 수강생 한 분이 있다. 강사에게 ‘아이스? 아니면 따뜻한 거?’를 묻고 홀연히 사라지는 60대 여성. 조금 지나면 강사가 선택한 대로 때로는 냉커피를, 쌀쌀한 날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가는 눈을 뜨고 나의 전신을 훑는 그녀의 시선을 몇 번 느꼈지만, 나는 수업이 끝나면 목례만 나누고 사라지기 바빴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가 내게 동호회 가입 의향을 비밀스럽게 물어왔다. 예상 밖의 일이라 “더 잘 치게 되면요.”하고 우물거리는데 원하면 자기가 속한 동호회를 소개해주겠다며 체육관 한켠을 가리켰다. 초보라 당장 가입은 안 될 거라고, 하지만 얼굴도장도 찍고 공도 치면서 미리 친해지라는  조언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3회 정도 수업을 받고 나니 강사가 나와 같은 초보 수강생 한 명을 같은 시간에 묶어주었다. 한눈에 봐도 매우 쾌활한 나의 파트너. 함께 수업을 진행한 첫날에 셔틀콕을 줍다 말고 내 나이를 물었다. 훅 들어온 질문에 급히 나이를 셈하다 그냥 ‘마흔셋’이라고 대답해 버렸다. 좀처럼 누군가 나이를 묻는 경우가 없어서 어느 순간부터 헤아리지 않아 헷갈리기도 했지만 처음 만난 사이라 그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파트너는 “어! 우리 동갑이네. 팔일, 맞죠?” 하며 반가워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개인사에 관한 질문 공세에 한 살 어리게 부른 내 나이를 정정하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그녀와 동갑이 된 채 수업이 끝났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한 것 같아 한주 내내 찜찜한 마음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정정하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막막했다.

‘안녕하세요! 그나저나 지난번에 말이죠. 내가 마흔셋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저 팔공이에요. 새 정부가 만 나이를 공식화한다길래 미리 낮춰 말한 거에 요. 호호호’ 아니면..... ‘내가 본래 12월생이라 마흔넷보단 마흔셋에 더 가까워요. 행여 언니라고 부를 생각은 마요. 히히히’  이리저리 고민해 봐도 뭔가 구차하고 민망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수업 일이 다가왔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파트너는 일전에 동호회를 소개해주겠다던 60대 수강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보자마자 나이 얘기를 해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듣고 싶었는데 실패였다.  머쓱해서 눈인사만 하고 구석에서 몸을 푸는데 파트너가 다가와서는 저분 소개로 동호회에 가서 얼굴도장을 찍고 왔다며 나중에 같이 가자고 권했다. 다른 나이 많은 초보 수강생에겐 동호회 얘기는 꺼내지도 않더라면서 아무래도 서열 관계가 애매해지니 섭외를 안 하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동호회 가입 권유가 기껍기보다는 그곳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선배 수강생이 오늘은 꼭 동호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라며 냉커피를 손에 들려주었고 덩달아 신이 난 파트너는 돌연 팔짱을 끼고 나를 연행해 갔다. 아직 나이를 정정할 기회를 못 찾아서 심란한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동호회 코트에 끌려가서 어색함을 뚝뚝 흘리며 차례로 인사 나누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여차하면 자리를 뜨려고 기회를 엿보는데 파트너는 옆에서 자기 얘기를 계속해댔다. ‘나는 도대체, 왜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 싶어 져 멍을 때리느라 그녀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조용했던 탓인지 한참을 주절거리던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이 숨 막히는 어색함!’ 사실 그녀의 말은 1도 안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금방 주말부부라고 했던가…? 어린 자녀가 둘이랬는데...’ 바로 이거다 싶어 잽싸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육박독아하느라 힘들겠어요.”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에서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려다 보니 독박육아 대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육박독아.

(육박: 바짝 가까이 다가붙음/ 독아: 獨我 혼자인 나)

생전 처음 듣는 이 참신한 표현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분명 생경한 말인데 어찌 이리도 입에 참 감기는 느낌일까 싶어 집에 돌아와 뜻풀이를 시도해 보았다. (꿈보다 해몽이라 하겠지만) 사람들이 바짝 다가와 붙었는데 홀로 있는 격이라니! 겨우 배드민턴을 한번 배워보겠다는 것뿐이었는데 원치 않은 관계를 자꾸만 맺어야 하는 상황이 내게는 조금 버겁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을 사이에 있다 보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만 같아 의기소침해지지만, 나같이 타고난 내향인이라면 별수 없는 노릇일 테다. 문득 입 밖에 튀어나온 생뚱맞은 말이 왠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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