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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암 투병 워킹맘, 인간극장 섭외를 거절하다


8월의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날.

하루하루 평범하게.


낮에는 약국일을 가고, 오후에는 아이를 하원시키고, 밤이 될 때까지 아이와 뜨겁게 노는 그런 하루.

내가 전이암 환자였다는 걸 잊어버리고 살고 있던 날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중, 나에게 메일 한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KBS <인간극장> 제작진입니다."




인간극장..? 인간극장!

와, 내가 어릴 때부터 보던 바로 그 프로그램!

그 유명한 프로그램에서 나에게 섭외가 오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암에 걸리고 나서야 이렇게 멋진 제안을 받을 수 있게 되다니.

아이러니하지만 한편으로는 ‘암’이라는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싶었다.




나는 23년 10월, 자궁암과 난소 전이암을 진단받았다.

전이암은 무려 17cm에 달하는 크기였으며,

수술로도 모자라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까지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항암치료를 더 받자는 담당 의료진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으나

심사숙고한 이후 추가치료를 거절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30대 워킹맘, 아주 평범한 엄마이다.


나는 이놈의 암이라는 병을 겪은 이후,

제2의 삶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일들을 항암치료가 끝난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씩 시작했다.


일단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브런치를 개설했고,

유튜브는 천명의 구독자를 넘겼으며

인스타그램은 5천 명의 팔로워 돌파,

다양한 업체에서 협찬과 협업 제안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나에게 많은 기회를 가져다 준건 브런치라고 할 수 있다.

브런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어주었으며,

이 글을 토대로 책을 한 권 낼 수 있었다.


제목은 <30살 약사엄마, 전이암과 싸우는 중>.

교보문고에 펼쳐져 있는 내 책을 보며 참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건강다이제스트라는 오래된 건강잡지에서 나를 인터뷰했으며, 월간에세이 등 다양한 잡지에서 기고 요청을 받았다.

'암환자'라는 경험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기회들이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이어가면서,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바람이 있었다.


바로, <방송 출연>.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정말 많이 보는 성격이다.


사실, 나는 암 환자가 되기 전에도 네이버 블로그 건강 인플루언서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와중에도 사회 속에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고,

블로그를 통해 건강지식을 나누며 그 욕구를 해소했다.


나의 엄청난 열정 때문이었는지 블로그 개설 5개월 만에 건강 인플루언서로 선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내 블로그를 찾아와 상담도 했다.


그 시절, ‘와, 내가 인플루언서라니!’ 하며 내 얼굴을 대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그랬더니 내 블로그가 나름 유명해졌던 탓인지

여기저기서 글을 잘 보고 있다는 연락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약사들은 내 블로그를 꽤나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참 내 성격이 알 수가 없는 성격이다.

그렇게 원하던 유명세가 생기자 갑자기 숨고 싶어졌다.

가까운 지인들이 블로그를 알게 되니 괜히 일상을 감추고 싶었고,

더 활동할 수 있는 기회들을 오히려 놓쳐버렸다.


책 출간과 온라인 강의 제안도 받았지만, 준비 부족으로 결국 흐지부지되었고,

블로그는 비공개로 돌려버렸다.

돌이켜보면 역량 부족이었다. 아직 그만한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의 선택이 후회로 남으면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강의도 해보고 싶고, 방송 출연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극장>! 공중파 진출이라니!

내적관종(?)인 나로서는 이게 정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

인간극장이라면.. 내 주변 일상이 다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만 방송에 출연한다면 뭐 이상이 없겠지만,

내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내가 사는 집과 다니는 직장, 나의 모든 일상이 공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굉장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하 너무 아까운 기회인데..., 그냥 눈 딱 감고 출연할까?"

"특별한 일상도 아닌데 뭐 하러 보여줘?"


두 가지의 고민이 계속 내 머리를 맴돌았다.

하루를 꼬박 고민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나는 섭외를 거절했다.




결정적인 건,

아이를 출연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일상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의 아이.

아이가 방송에 출연함으로써

'아픈 엄마의 아이'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정말 감사하게도, 출연을 제안해 주신 제작진 분도 흔쾌히 이해해 주셨다.

혹시나 다음에라도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라고 하셨다.


언젠가 약사 패널이든, 간단한 일상 생활 공유이든

많은 암환자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 방송출연을 해보고자 한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며 많은 공부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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