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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Oct 26. 2016

그곳에 가고 싶다

확정된 따뜻함이 필요할 때 - 여행 숙소 편

무리 지어 사는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누군가 내게 관심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 그 작은 것이 종종 세상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래서 서로를 찾는다. 그렇다. 누군가 나를 찾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필요한 거다.


세상은 넓고 싫은 사람은 많다


사실 난 지인 풀이 넓지 않다.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것이 노력으로 안된다는 것을 20대에 알았다. 저주에 가깝게 단점을 집어내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권력 앞에 유독 비굴해지는 사람들(약한 것엔 반대로 잔인하다)

거품 물고 반대하다 쉽게 뒤집는 사람들(부끄러움은 나의 몫 이리라)

속이 다 보이는 사기 치는 사람들(사기도 고수면 존경스럽고 거짓말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다)

주고받는 거 안 되는 사람들

불편한 것이 싫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해야 할 말이나 할 일 안 하고 뭉개는 사람들(너희의 유아기는 참 길구나)


이런 능력은 짜증유발자들을 피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둥글게 사는 것이 어려운 장애이기도 하다.


모르고는 잘 지내지만 이런 것이 눈에 띄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개인적으로는 안 보고 산다. 당신 예상이 맞다. 난 좀 지랄 맞은 인간이다.


나와 같진 않겠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싫은 사람들과 마주하고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거다. 더구나 포기가 어려운 혈연이나 일로 묶이면 그때는 사는 것이 지옥이 된다.


입 다물고 내 말만 들어...


운 좋게도 난 시간이 많다. 누구나 돈이 생기면 가장 사고 싶은 것을 사듯이 난 아무것도 안 할 시간을 샀다. 누가 보면 미친 거지.


덕분에 만나자고 하면 거의 나간다. 불러주면 반갑다. 그들이 궁금하고 즐거운 대화가 있는 만남엔 나도 따뜻해진다. 디지털 시대이지만 아직도 얼굴 보고 친밀함 느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행복은 잘 나누지 않는다. 사는 것이 즐겁고 불만이 없으면 서로가 덜 필요한가 보다. 오히려 힘들 때 더 많이 찾는다.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싫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시간이 많으니 하소연할 곳이 필요할 거다.


하소연과 뒷담화가 꼭 나쁜 건 아니다. 나도 한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군집을 이루어 살기에 필수다. 정보와 감정을 공유해서 친족 범위를 넘는 집단생활이 가능한 거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그러나 반복되면 참 지겹다. 더구나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쏟아부어대는 식의 만남은 끝나면 녹초가 된다. 그리고 여기엔 '적당히'라는 브레이크가 없다. 쏟아내는 것을 보면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화를 내는 것 같다.


나도 안다. 사람은 대부분 다른 이에게 관심이 없다. 평생 액세서리는 안 하는 내게 자신이 좋아하니 계속 그것만 선물하는 울 엄마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관심은 둘째치고 '경청'이라는 것을 장착만 했어도 감사하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자기감정에 취해 쏟아내는 사람은 남의 말에는 관심이 없다. 질문하고 대답 끊는 건 애교이다(왜 물어봤니 싶다). 심지어 내가 해 준 얘기를 나에게 다시 해주기도 한다. 자기 생존이 생명의 본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아닌 남을 봐주는 따뜻함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웃어주며 물어봐주고 들어주는.


그저 따뜻함이 그리울 때...

그럴 때마다 가고픈 곳이 있다. 돈으로 형식적이라도 배려 담긴 따뜻함을 살 수 있는 곳.

크라비의 라야바디와 우붓의 코마네카.


돈으로 사는 친절. 불쌍하고 저급한가?

글쎄, 난 자본주의에 사니까. 근데 저급한 것은 친절은 당연한 것이고 돈 값을 하라며 따져대는 사람들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들의 친절에 고마워한다. 그리고 그들 행동에 내 돈 값 따위는 안 따진다. 기대에 미치건 아니건.


비싼 숙소가 꼭 감동스러운 따뜻함을 주진 않는다. 외지거나 호화 시설 때문인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처우가 좋지 않다면 절대로 따뜻함이 전달되는 미소 따위는 없다. 사람의 미소와 말투에서 강요된 것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다. 감정노동이 나쁜 건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에 있는 거 아니던가.


정성스러운 손편지, 따뜻한 미소로 건네는 인사 한마디, 오늘은 어떤지 뭘 할 건지, 도와줄 일은 없는지 물어봐주고 내 대답을 자르지 않고 들어주는 그런 소소한 따뜻함이 가끔 필요하다.


물론 지인들에게 받거나 우연히 만난 타인이라도 좋겠지만 '거기'에 가면 확실히 있다는 것이 그곳을 다시 찾게 해준다. 비록 돈으로 산 서비스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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