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그들의 잘못일까?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와트'로 유명하다.
이 도시는 이 유적지로 전 세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한국에서 가깝고 저렴한 물가 때문인지 단체 여행객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별로다. 일종의 수학여행 같다. 취향이 저렴해서 난 거기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녹아 있는 장소들이 좋다.
하지만 가족여행이라면 유적지는 놀이에 대한 죄책감(?)을 줄여준다. 공부라는 것에 유독 너그러운 나라 아닌가.
그래서 초등학생 조카들, 부모님, 동생들로 이루어진 3대가 함께 갈 수 있는 가족여행지로 적당했다. 겨울이니 이왕이면 따뜻한 곳, 멀지 않고 경제적 부담도 적으며 뭔가 보고 배울 것이 있는 곳.
언제나 그렇지만 열심히 계획한 여행일수록 처음 의도와는 정반대로 튄다.
최소로 줄인 야외활동에도 부모님은 더위에 짜증 섞인 막말을 쏟아냈다. 급기야 난 생각 없는 불효녀로 찍혔다. 수영장을 벗어나면 징징대는 조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루 종일 수영장에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이 불결하고 위험하다 걱정하는 막내 동생도 피곤했다. 단 한명만 이곳이 좋다며 다시 오고 싶다 했다. 그 동생이 없었다면 난 완벽한 지옥 여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다. 선택할 수도 없지만 버릴 수도 없다. 절대 끊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서로에게 남보다 더 한 상처를 준다. 차마 남에겐 못할 막말을 쏟고 다른 곳에서라면 가릴 감정들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정교하고 장대한 건축에 대한 경외심이나 덧없는 문명의 몰락 등은 느낄 겨를도 없이 난 무능력한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도대체 왜 이들을 끌고 왔을까? 뭘 위해 수십 건의 예약과 준비를 했을까? 남에게 이렇게 해줬어도 같았을까? 가족이 과연 남보다 나을까?'
물론 SNS에는 행복한 가족의 사진이 연출됐다. 그것이 SNS에 올라오는 것을 꽤나 의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현실은 그것이 아니니 행복을 연출하고 싶은 것 아닐까 나처럼. 그게 아니면 아픈 자식 사진 찍고 너도 소중하다는 남편 메시지 스샷과 함께 난 행복하다며 올리는 것을 뭘로 이해하겠나. 행복은 SNS에 자랑할 틈도 필요도 없는 거다.
짜증즘이야. 섭섭이야 하지만 본인 불편하면 배려를 날려 버리는 사람을 처음 본 건 아니니까.
사실 나를 가장 힘들게 부분은 이곳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게으르니 빈곤하고 그러니 무시를 넘어 경멸에 가까운, 나는 그래도 좀 우월하다는.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합당한 근거에 의해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이 미리 결론 내리고 이성이 뒤이어 합리화를 찾는다.
인간은 판단이 내려지면(판단 자체도 뇌 속의 비의식적인 인지 장치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옳을 때도 있고 옳지 않을 때도 있다), 그 근거를 하나둘 만들어내 그것들이 자신이 내린 판단의 설명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근거라는 것들은 사실 (해당 주장에 대한)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 Margolis -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물과 도시 앞에서 이들은 더우니 게으르고 그러니 가난하다 결론 내린다. 아이러니다. 눈앞에 이것들은 외계인이 만들었나?
특히나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와 서구 중심 사대주의가 적절히 범벅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단순한 추론을 해댄다. 심지어 불교 신자가 많아서 그렇다나? 미숙한 종교에는 답도 없다.
사실 그곳에 대한 평가는 딱 당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다. 앙코르와트가 세워지던 전후로 번성했던 크메르 문명은 인구 70만의 세계도시였다. 런던과 파리의 그 당시 인구가 7만, 10만이었다. 어떤가? 그 시대에 평가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거다.
더구나 역사는 노력에 의해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며 개선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진화를 진보로, 기술의 진보를 인간의 진보로 착각한다.
역사란 진보나 쇠락의 과정이 아니라 얻다가 잃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지식의 발전을 보면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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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에 의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근저에는 자신의 필멸성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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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삶은 과학과 기술을 한껏 활용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온전한 정신을 주리라는 환상에는 굴복하지 않는 삶이다. 평화를 추구하되, 전쟁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삶이다.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라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에서 잠깐씩만 찾아오는 가치라는 점을 잊지 않는 삶이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 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데 있다.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 존 그레이 -
운 좋게 조금 나은 곳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우쭐할 만큼 그들과 난 다르지 않다. 더구나 빈곤은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파괴와 착취는 역사에는 물론 현실에도 널려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주어진 곳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같은 인간이다.
여행 중에는 잊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손님으로 갔다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곳을 방문할 때 훨씬 맘을 다잡는다. 자칫하면 저렴한 물가는 무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여행 중에도 충분히 착하게 살 수 있다. 그곳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쓰는 것, 행동하는 것에 좀 더 신경이 쓰인다.
아마도 나는 다시 씨엠립 가는 것이 주저될 것이다. 팍팍한 현실은 사람보다 동물에게 더 가혹하다. 길거리에 다니는 뼈가 앙상한 개들이나 못 먹어서 휘청대는 고양이들을 보는 것이 내겐 고문이다.
그렇지만 그곳엔 예전 찬란했던 유적을 지니고 게을러서 빈곤한 것이 아닌 주어진 것에서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씨엠립에서 업어 온 그림 속 사람들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