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게 안다는 것
처음이 어렵다. 일주일 넘는 프라하 여행으로 우리(냥이들과 나 그리고 집사 친구) 사이 암묵적인 최대 여행 기간이 정해졌다. 10일 전후 보름 미만.
3월이면 비수기다. 그렇다면 관광객만 있는 세트장에 왔다는 느낌은 없을 거다. 남유럽이니 겨울만 아님 괜찮으리라. 그래서 마드리드 출장이라는 친구의 말에 바로 결심한다. 그래, 가보자 스페인.
나았다고 착각했던 몸이 장시간 비행에 무너졌다. 더구나 마드리드는 소매치기 4위다. 다른 건 몰라도 스마트폰과 여권 분실은 곤란하다. 잔뜩 긴장해서 도착한 숙소는 숨 막히게 좁았다. 숙면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런 몸을 끌고 담날 찾아간 프라도 미술관에서 '넘치는 감동?' 그런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여행은 몸상태에 꽤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하늘이 좋았고 덕분에 가는 길이 이뻤더랬다. 나오길 잘했다고 나를 칭찬해줬다. 미술관 앞 나무에 초록색 앵무새들도 한 몫했다.
도시에 참새가 아니고 앵무새라니.
내겐 박물관보단 미술관이 낫다. 그리고 미술관 대작들보다 거리에서 만나는 작품들이 더 낫다. 한마디로 저렴하시다. 누군가는 프라도 미술관 때문에 마드리드를 온다던데 내겐 그 정도는 아니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새로운 발견을 방해한다. 인지 과정이 적당히 생략되는 거다. '책에서 본 거네. 원래 크기가 이랬구나. 붓 터치가 생생해 보이긴 한다. 근데 밀려오는 원작의 감동? 모르겠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것을 마주할 때 그 순간이 강렬하게 남는다. 프라하에서 알폰스 무하를 볼 때처럼. 그때 난 무하를 몰랐다. 모르는 새로운 것엔 주의가 집중된다. 포스터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급기야 그 느낌을 담아 줄 기념품들을 집어 들었었다.
낯설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 자세히, 오래 보고 있을 때 예전엔 모르던 것이 발견된다. 단, 그러려면 많이 좋아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난 둘 다 아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 나태주 -
프라도 미술관은 고야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작품 앞에서 어떨까?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라는 고야의 작품이다.
1808년 프랑스 나폴레옹에 저항한 대가로 보복성 처형을 당한 마드리드 시민들을 그렸다.
화면의 3분의 1을 덮어 짓누르는 어둠. 배경으로는 탑이 있는 커다란 건물과 초목이라곤 없는 붉은 흙의 언덕이 보인다. 빛이라고는 병사들의 발치에 놓인 랜턴뿐이지만, 중앙에서 양손을 높이 쳐든 남성 자신도 발광 원인 것처럼 주위를 밝히고 있다. 물론 이 남자가 이 그림의 중심이다. 결백의 증거라도 되는 듯 빛나는 흰 셔츠를 입고, 십자가에 못 박히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손 바닥에는 성흔을 연상시키는 상처까지 있다.... 무엇보다 병사들에게는 얼굴이 없다! 이들 얼굴 없는 살인 기계와 달리 처형당하는 쪽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개성적이다. 말하자면, 죽이는 쪽에서 보기에는 한 덩어리지만 죽음은 어디까지나 저마다 개인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떤 이는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부릅뜨고, 어떤 이는 기도를 하며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다.
- 무서운 그림3, 위험한 진실의 명화들 | 나카노 교코 -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을 그린 것이다.
'자기상 자각'이란 사람이 직접 자기 눈으로 자기의 바깥에서 자기를 보는 착란증인데, 거기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자기 몸에서 빠져나와 3차원 공간 속에서 자기 몸을 보는 체험(OBE: out-of-body experience),...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OBE 체험에 속할 것이다. 거기서 화가는 마치 유체 이탈이라도 한 듯 자기 몸에서 빠져나와 3차원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신체를 본다.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
같은 곳에서 같은 그림을 봤을 텐데 참 많이 다르다. 읽었던 걸 기억해 내면서 보면 조금은 달라 보이긴 하지만 미안하게 딱 거기까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의 가장 좋은 방법은 때로는 같이 때로는 따로 다니는 것이다. 각자 출발해서 현지에서 따로 만나는 것도 좋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나면 반가움이 두 배가 된다. 그리고 그 반가움이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준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세비야행 열차를 타기 위해 들어선 기차역에서 만난 친구는 무지 반가웠다. 그 반가운 덕이었을까? 기차역을 채우고 있는 식물원 같은 풍경은 나를 계속 웃게 했다.
누가 북적이는 이곳에 오아시스 같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을까? 복 받으시리라. 프라도의 대작들보다 내겐 이 곳이 더 강렬했다.
미안하다 프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