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인들의 손길 - 알람브라
그라나다, 스페인 남부 작은 도시이다. 개인적으로 스페인 여행 중 가장 맘에 들었다.
작아서 그냥 걷기 좋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거리마다 가로등도 각기 다르다. 난 이런 획일화되지 않은 세심함이 좋다.
걷다 눈을 들면 만년설에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숲 속을 걷는 듯 한 알람브라까지 산책길도 좋다. 알람브라 건너편에는 알바이신 지구의 하얀 건물들이 사이프러스 나무와 멋지게 어울린다.
알바이신 지구를 돌아보고 건너편 알람브라를 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잡는다. 경험상 유적이나 예술품은 가이드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 그들이 내가 찾거나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정보는 인터넷에 널렸다고? 장담컨대 그걸 가지고 가면 숙제하듯 확인하는 것 이상을 보기 어렵다.
글이나 사진으로 본 걸 '단지 눈으로 확인'하려고 여행하는 건 아니다.
알바이신 지구는 쫓기며 살던 집시들의 슬픈 주거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산기슭에 굴을 파고 살다가 마을이 이루어진 것은 실제 그들의 삶과 다르게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다른 사람의 슬픈 삶도 멀리 서면 예술로 승화되고 아름답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언덕진 산동네, 다닥다닥 붙은 작은 기와집들, 굽이굽이 골목길... 낯익은 풍경이다. 어릴 적 서울의 모습이 이곳에 겹쳐진다.
유럽이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었다 자부하지만 실제 영토의 상당 부분이 오랜 시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알람브라이다. 요새 겸 궁전인 이곳은 알바이신 지구 건너편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용병으로 온 무어인들이 살기 좋겠다고 눌러앉았다고.
알바이신 지구에서 본 알람브라의 겉모습은 소박하다 못해 투박해 보였다. 산 위에 몇 개의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황갈색의 밋밋한 모습. 이 투박한 단층집을 상처 없이 얻기 위해 이사벨라 여왕이 그렇게 공을 들였나 갸우뚱해질 정도로.
우린 종종 겉모습으로 모든 걸 판단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사실 그게 쉽다. 공들여 생각할 필요도 없잖은가? 보이는 그대로만 판단하기. 그래서 보이는 부분에 온통 신경을 쓰고 산다.
자책하지 마시라. 원래 뇌는 게으르다. 쉽게 판단하고 결론 내릴 수 있다면 굳이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당신이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이상.
'네가 틀렸어!!!'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알람브라가 내게 외쳤다. 조촐한 겉모습과 아담한 건물 안에 정교하고 화려한 무어인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건물뿐이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겉이 화려한 이들이 오히려 내면은 허접한 경우가 많다.
만약 살면서 알람브라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행복하리라. 마치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하듯이. 겉으로 투박하고 수수해도 내면에 놀라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들.
이곳의 주인이었던 무어인들은 미적 감각 못지않게 인간의 본성을 잘 꿰뚫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작고 위압적이지 않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구조를 제대로 잡았다.
그래서 이곳에 처음 들어설 때 긴장이 풀린다. 마치 나처럼. 그리고 풀어진 긴장이 약간의 무시로 이어질 즈음 반전이 나타난다. 이 반전은 외교 사신의 영접 경로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나지막한 건물로 들어서서 대기실에 머무르다 정원을 거쳐 왕을 접견하는 방까지의 이동 경로와 그 사이사이 빛, 물, 향기, 소리까지 세심하게 배치했다.
사람이 얼마나 사소한 것에 쉽게 바뀔 수 있는지 간파했으며 감탄에 이어 주눅 들다 경외심까지 가질 수 있는 꽤 완벽한 구조를 재현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외교에 이용했다. 덕분에 전쟁을 피하며 협상의 대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난 무어인들의 이 방식이 맘에 들었다. 인간에 대한 통찰은 하려는 것들을 수월하게 해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그 무엇을 하든지 꼭 필요한 준비물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멀리 역사나 정치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도 이런 것들은 자주 접할 수 있다. 붐처럼 일고 있는 IT벤처 창업에서도 흔히 사람들은 지식과 기술, 인맥, 자금에 먼저 집착한다. 결국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간과한다. 원래 가장 중요한 것은 간단하고 흔하며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법이다.
역사에서 승자가 꼭 더 나은 인간은 아니다. 아울러 넘겨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경우도 많지 않다. 무어인들에게 이 곳을 빼앗은 스페인 사람들은 시계로 쓰이던 사자 분수를 궁금하며 뜯었다가 망가트렸다. 슬프게도 지금은 시간과 상관없이 물만 나온다.
초기에는 아름다움에 그대로 사용했던 곳은 시간이 지나면서 개조되고 부서지며 자신들의 건축물로 채워지기도 한다. 특히 카를로스 5세 궁은 알람브라 바로 옆에 지어진다. 가톨릭의 위세를 드높이려 위쪽에 자리 잡고 짓다가 멈춘 이 쓸모없는 궁의 무게 때문에 알람브라가 무너지고 있다.
맞다. 이 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똥을 싸신 거다. 이것도 유적이기에 없애지도 못한 채 후대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때론 후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은 사람들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씁쓸하게도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세대를 이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보다 더 못한 이들에 의해 정복되어 축적되지 못한 채 파괴된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더디게 돌고 돈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것을 인간에 대한 진보라 착각하면 안 된다. 현재도 우린 20년 뒤로 역사가 뒤돌아 가는 상황을 보고 있지 않은가? 얻었을 때 그것이 영원할 것으로 혹은 축적되어 그 바탕에서 도약할 것으로 안심하면 언제든 다시 잃을 수 있다. 인권이던 민주주의던 인간사에 아무리 어렵게 얻은 가치라도.
아름다운 궁이 파괴되지 않게 무혈입성을 명하고 떠나는 왕이 영토보다 궁을 잃는 것을 더 슬퍼했으며 그 아름다움에 이교도 상징이 가득한 궁을 가톨릭 왕가에서 한동안 그대로 사용한 곳.
이 곳은 번성하고 사랑받은 만큼 잊힌다. 집시들과 떠돌이들의 숙소가 되었다가 워싱턴 어빙의 '알람브라 이야기'라는 여행기로 재조명받게 된다.
한 번쯤 들어봤을 타레가의 기타 연주곡인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여름 궁전(헤네랄리페)의 물소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연인과 이별 직후였다고. 예술은 슬픔을 먹고 자라 꽃피는 거 맞다.
다행히도 나는 무너지지 않은 알람브라를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버팀목을 댄 채로 알람브라가 버티고 있었다.
무어인들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히 남은 채 오랫동안 묻혔다가 다시 드러난, 이 보물 같은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