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
로마 마지막 날이다. 고대 로마 투어를 한다. 콜로세움에서 캄피돌리오까지 걷는다. 원래도 저렴하지만 남부 투어를 하면 공짜다. 가격과 감동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로마에서 가장 좋았다.
일찍 나갔지만 지각 중이다. 어라? 버스가 경로를 이탈한다. 11월 1일은 모든 성자의 날로 공휴일이다. 행사로 길이 제한된 거다. 당연히 몰랐다. 여행사에 연락하며 버스를 갈아타고 내려서 뛴다. 숨 가쁘게 도착한 후가 더 당황스럽다.
오늘 투어는 우리뿐이다. 선배는 분명 입 다문 어색한 분위기를 낼 거다. 명랑 모드는 내 몫이다. 가이드도 어색해한다. '친구가 놀러 와서 같이 다닌다고 생각하세요. 홍콩 갔을 때 친구 생각나네요'라고 말을 건넨다. 내가 기특하다. 잘하고 있어!!!
콜로세움 앞에 선다. 오락거리로 수십만의 동물들이 죽어 나갔다. 그 후엔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살육의 장소이다. 여기까지 내가 아는 거다.
하지만 원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미친 황제로 유명한 네로의 궁이 있던 자리다. 그걸 밀고 시민 원형극장을 만든 거다. 입퇴장이 원활하게 사방으로 입출입하는 구조를 고민하고 물을 채워 수상전 놀이까지 가능하게 설계된다.
사실 가책 없이 대량 살육을 즐기게 된 데는 대중을 이용한 권력과 그것에 동조한 일부, 묵인한 다수가 있었다. 권력은 항상 대중을 이용한다. 권력자 입에서 개/돼지 얘기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조가 아니더라도 못 본 채 고개 돌리고 묵인하면 바닥까지도 간다.
콘스탄틴 개선문을 지나 전차 경기장으로 간다. 뒤편 포로로마로가 보인다. 저곳에는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이 있다. 번영기인 팍스 로마나 기간 집권한 황제 중 하나다. 이 사람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놀랍지 않은가? 로마 번영의 기반은 포용성이다.
그 후 2천 년이 흘러 자부심 가득한 현대 미국에서 당선된 대통령이 떠오른다. 씁쓸한 현실이다. 아마도 그렇게 쌓아 올린 걸 잃어갈 것이다. 다양성과 포용력이 없는 사회는 지속되기 어렵다. 아쉽게 로마의 유산은 중간중간 맥이 끊겼나 보다. 그렇게 역사는 돌고 돈다.
전차 경기장에서 길을 건너면 한적한 곳이 펼쳐진다. 새소리도 들리고 북적이던 사람들도 사라진다. 공원도 골목길도 한산하고 이쁘다.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동네다.
가이드는 이곳이 로마의 부촌이라 했다. 그럴 것이다. 나라도 가능하면 이곳에 살겠다. 강변의 전망 좋은 수풀 가득한 언덕 위. 아벤티노 언덕 위.
이곳엔 몰타 기사국의 건물이 있다. 기사국? 나라? 맞다. 몰타 기사국도 나라다. 잠긴 문의 열쇠 구멍으로 보면 정원 나무들 끝에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정면으로 보인다. 짜 맞춘 것처럼 정확하다. 폰으로 아무리 찍어봐야 안 나온다. 눈으로 보시라.
언덕 뒷길로 산책하듯 내려와 진실의 입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빙빙 돌아 줄 서 있다. 가이드가 그나마 오늘은 짧다고 한다. 로마에서 항상 북적이는 곳 중 하나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장소들. 스페인 계단, 트레비 분수, 진실의 입.
여행은 현실이 영화와 얼마나 다른지 알려준다. 사진은 그제 저녁에 갔던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계단이다. 자신의 집중력을 시험하기 좋은 장소다. 사람들 사이를 밀고 밀리며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감동해보기.
평소라면, 가이드만 아니라면 절대로 저 입에 손 한번 넣자고 줄 서지 않는다. 하지만 난 소심하고 선배는 범생이다. 우린 예의 바르게 줄을 선다. 그리고 기다려 가이드 말대로 손을 넣고 사진을 찍는다.
로마는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많다. 진실의 입도 정치도구이다.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도구. 진실을 말하면 손이 무사하리라 협박하고 사실과 관계없이 뒤에서 손목을 자른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정치 도구.
다음 장소까지 가이드가 버스를 타자고 한다. 2-3 정거장 거리다. 걸을 수 있지만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 투어 마지막 장소인 캄피돌리아 언덕 앞에 내린다.
이 언덕과 광장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아래서 보면 오르기 만만하다. 천재답게 착시효과를 준다. 직선이 아닌 사다리꼴인 거다. 아래서 슬쩍 보고 만만하게 올랐을 많은 사람들을 물 먹이는 천재성이다. 계단을 오르며 버스를 제안한 가이드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 올라보니 뭔가 밋밋하다. 근데 완성 후 당시 평가도 같았나 보다. 그들의 평가에 이 천재가 한 방 날린다.
'니들 보라고 만든 거 아니거든? 하늘에 계신 신이 보라고 만든 거다 이 인간들아'
천재는 두 종류다. 천재인 것을 알고 잘난 척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다 생각하는 겸손한 부류. 미켈란젤로는 전자다. 그래도 밉지 않다. 멋지잖아? 잘난 놈이 잘난 척하는 건 봐준다.
사실 이 언덕이 가장 맘에 든 이유는 뒤편으로 펼쳐진 포로로마노(영어로 로만 포럼)이다. 무너진 유적을 상상으로 짜 맞추면 그 당시 사람들이 살던 모습이 보인다. 신전과 광장, 시장, 화장터.
이것 하나만으로도 로마에 다시 올 거다. 오늘 걸었던 길, 고대 로마인들이 실제 걸었던 그 길로 산책하며 캄피돌리오 언덕에 올라 포로로마로를 보리라. 그때는 콜로세움 건너편 트라스테베레 지역에 머물면서 그 동네도 산책할 거다.
꼭 다시 보자 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