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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Oct 16. 2016

천천히 걸어보기

잘란잘란 걸어볼래요?

나이 들면서 바뀌는 한 두 가지가 생긴다. 늘어나는 뱃살을 빼놓더라도 입맛 혹은 취미나 취향, 가치관 등등.


단시간에 바짝 땀 흘리고 끝나는 운동이거나 배우고 익히는 것 같은 취미생활이 아니라면 고개를 저었다.


등산? 산책? 그런 것들 도대체 왜 하는 거지?

우선, 등산을 보자. 낑낑거리면서 어차피 내려올 산을, 그것도 올라오지 말라고 말라고 그렇게 험하게 난 곳을 꾸역꾸역 왜 기어 올라가는 거야? 땀 흘리면 어디 씻을 곳도 없어 짜증스럽고.

뭐 여전히 등산은 안 한다.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직은.


그런데 산책은... 달랐다. 그래 맞다. 여행은 가끔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발리 우붓은 신혼여행 중 잠깐 들리는 곳 혹은 어떤 영화에 나오면서 요가와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오거나 최근엔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이들이 머무는 곳 중 하나로 유명하다. 그렇게 가도 좋을 곳이다.


난 선배와 짧게 머리 식히러 갈 곳을 찾다가 여기면 좋겠다고 했다. 갈 때만 해도 수영장에서 책 읽고 뒹굴거리다가 미술관을 보고 길거리 샵에서 소품 구경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짜다가 아침에 동네 둘러볼 겸 산책이라도 할까 하고 찾은 곳이 짬뿌 안 리지 워크(Campuan Ridge Walk Ubud)이다.

반얀트리가 우거진 샛길로 들어서 사원을 끼고돌면 돌바닥을 정성스럽게 깔아놓은 길이 나온다. 양쪽에 코끼리풀(Elephant Grass)이 우거진 길을 정말 기분 좋게 걸었다.


여행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유독 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던가. 이 곳이 내겐 그랬다.

그냥 풀 숲 사이 길을 이런저런 얘기하며 걸었다. 걷는 것 자체가 이 길 자체가 그냥 좋았다. 나중에 혼자 와서 다시 꼭 걷고 싶었다. 예전에 내가 걷는 것을 이리 좋아했던가.


산책, 일상의 빈틈 만들기


'잘란잘란'이라는 단어를 아시는지. 인도네시아의 지도를 보면 길 이름 앞에 Jl.(Jalan)이 붙어 있다.

즉, 잘란잘란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혹은 산책하다는 의미이다.


목적지 없이 어슬렁 돌아다니는 것은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도저히 엄두내기 어렵고 아까운 시간이다. 걷는다면 목적지가 없더라도 목적이라도 있어야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거다. 건강 같은 것들.


틈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흔히 얘기하는 성공하는 삶 아니던가. 그렇게 배우지 않았었나? 계획을 세워라.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한 시간이라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도록 쪼개라. 시간은 금이다. 속았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 일상적인 삶 | 장 그르니에 -


다시 우붓에서와 같은 산책을 시작한 건 꽤 오랜 후였다. 한동안 자리보전할 만큼 아프니 짧게라도 침대 밖으로 좀 나가고 싶어 졌다.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된 동네 공원 산책에서 잊고 있었던 우붓의 그 길이 생각났다. 반가웠다. 집 근처에서도 이렇게 잘란잘란 다닐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난 내 생활에서 빈틈을 만들 수 있었다. 뭔가가 생길 빈틈들을. 우붓의 기억 덕분에.


그냥 목적 없이 한 번 걸어보는 거다. 혹시 아는가?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문제가 갑자기 풀릴 수도 혹은 사는 중에 재밌는 놀이 하나 발견할지도 모른다. 내가 산책에서 떠오른 단상들을 적다가 이렇게 글로 정리하겠다고 맘먹은 것처럼.



여행에서 발견하고 삶에서 한동안 잊었던 것을 다시 떠올려 살아가는 거. 돌아와 내 삶의 방식 중 하나를 바꿔볼 수 있는 작은 여지를 주는 거. 여행의 매력 아닐까?


기억을 만드는 작은 것들


거창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곳으로 여행은 기대감을 동반한다. 떠나기 전 대충 예상한다. 이럴 거 같다 혹은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막상 기대했던 것들이 대해서는 감동이나 흥분보다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통계상 여행 준비기간에 대한 행복감이 직접 갔을 때보다 높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면?


우붓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미술관이 꽤 있다. 막상 유명한 미술관 작품들은 보면서 나는  '음... 그래, 발리 전통화는 이런 거였구나. 수집하느라 좀 고생하셨겠다'라며 시큰둥했다. 아마도 나의 무식이 이런 행동에 가장 큰 기여를 했을 거다.


그때 갑자기 조각상 하나가 훅하고 들어왔다. 그림 옆에 한쪽 구석에. 작품명과 작가명도 없는.

마치 그 자리에서 자라난 나무뿌리에서 자연스럽게 타고 올라와 조용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냥 서서 보고만 있어도 착해질 것 같은 평온함을 가지고.


사실, 웅장하고 화려한 것들과 유명하거나 랜드마크 같은 것들은 여행 후 시간이 지날수록 잘 남지 않는다. 아마도 예상했던 것을 확인하는 것은 주의력과 관찰력을 날려버리는 것 같다.


차라리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미술관 한쪽 구석의 조각상이나 그 동네 산책길이 더 여운 깊이 남아 두고두고 그 여행을 기억하게 한다.


그랬다. 예상하지 않던 작은 것에서 그곳의 기억이 더 잘 불려 나와 오래오래 추억될 수 있는 것이다.


사는 것도 비슷할 때가 있지 않나. 대단한 일과 어마어마한 성과보다 소소한 일상의 한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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