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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Oct 15. 2016

가끔은 사치도 괜찮다

흘러가는 시간 바라보기

불과 몇십 년 사이 여행은 쉬워졌다. 인터넷에 널린 정보들, 손쉬운 예약, 낯선 길을 안내하는 맵들.

그래서 이제는 흔치 않은 장소가 아니면 시큰둥해지고 장소가 흔하면 방법이라도 달라야 눈길이 간다. 퇴사 후 배낭을 메고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세계인을 친구 심아 발로 장기간 여행을 하는 것도 넘쳐나니 식상해진다. 물론 당사자에겐 둘도 없는 경험이리라.


돈을 뿌리듯 고가 숙소에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보통 허니문이 아니면 남은 생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젊다면 그리고 제대로 된 여행의 묘미를 알려면 저렇게 고가의 안락함을 추구하면 안 될 것 같은 강박도 한편에 존재한다.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한 번 가본다


이런 강박의 기준으로 보면 Krabi에 위치한 Rayavadee는 가장 피해야 할 곳이다. 공항부터 전용차와 보트로 마중 나와 꽃팔찌를 끼워주며 숲 속에 들어앉은 개인 숙소에서 24시간 지정된 담당 스텝의 친절함과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곳.

사실 이곳은 나보단 친구의 취향이다. 난 어디든 여행을 가 고팠고 친구는 Krabi에 이 숙소에 가고팠다.

그리고 역시나 신혼부부나 노년을 즐기는 커플들 사이에서 친구랑 꽤 생뚱맞게 끼어 있었다.


나는 과연 나랑 얼마나 친한가?


그 당시 오롯이 나에게 결정을 맡겼다면 아마 오지 않았거다. 여기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뭘 보거나 진이 빠질 정도의 액티브한 활동할 것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퇴사 후였기에 집에서도 충분히 빈둥거렸다. 휴식이란 거? 글쎄다 별로 필요하지 않은데 싶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의외로 난 늘어져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는 것을 배웠다.


당신은 어떨 때 '이 사람과 정말 친하구나'라고 느끼는가? 나는 아무 말없이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정말 편하고 친하다 느껴진다.

굳이 뭔가의 행동이나 얘깃거리를 꺼내지 않고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친한 친구 아닐까?


그럼 나는 나랑 얼마나 친한가?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과연 외부 자극 없이 혼자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나?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 팡세 | 블레즈 파스칼 -


내가 얼마나 혼자서 차고 넘치는 시간을 지루해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려면 이 곳에 가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지루해한다면 나랑 좀 친해져 보면 어떨까? 나는 나랑 평생 친구 아닌가.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 흘려보내기


우리는 내성적보단 외향성이, 소극적보다 적극적인  태도가, 비관보다 긍정이, 사색보다 활동이 더 평가받는 곳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뭔가를 하고 있지 않거나 했더라도 결과 없이 보낸 시간을 아까워하고 무의미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분주하다.


그리고 여행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활동들과 시간을 쪼개 하나라도 더 건져야 한다는 생각에 노동이 되어 버린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와서도 온전히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가치 없고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겐 여행이 반복되면서 이 시간들의 가치가 더 크게 다가왔다.

선배드에 책 들고 누워 읽다가 자다가 하기, 나무 그늘 밑에 앉아 그냥 멍하게 수평선 바라보기, 노을이 내려앉아 모든 형채가 검게 변해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햇빛 아래서 알록달록한 모든 것들이 석양과 함께 모두 검게 변하는 것을 멍하니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인생에서도 어느 순간 구분이 안 되는 일들이 생기지 않나.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 앞에서 얼마나 조바심 내었던가. 삶도 내 눈앞의 자연처럼 원래 모호한 것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면 그 순간들에도 그리 조바심 내지 않았을 거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피로사회 | 한병철 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비우며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다른 방향에서 보게 해준다. 난 이곳에서 그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싶다면 여행 전후 노동에 가까운 것을 최소로 할 수 있는 가끔 이런 사치를 부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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