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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Teller Nov 05. 2024

인간 내비게이션

아빠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길을 지나다보면 사람들은 내게 길을 자주 묻는다.  ”여기에 본 oo정형외과는 어디 있는 교?"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나 할아버지분들이 주로 대상이다.

전엔 왜 그렇게 나한테만 묻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젠 내가 잘 알 것 같아서, 아님 말 걸어 봄직해서 그런가 보다 한다. 이젠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 알려드리거나 같은 방향이면 함께 동행하기도 한다. 그럼 정말 감사하다고 어린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하시고 정말 맑게 웃어주신다.

그거면 기쁘고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그런데 난 사실 길눈이 진짜 어둡다.

건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도 태어난 지역에서 자라고 결혼해 살고 있는데 아직도 운전할 땐 늘 신랑에게 이 길이 맞냐, 몇 차선으로 가야 하냐, 깜빡이 지금 넣어야 하냐 물어본다.

그런 내가 길을 안내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가보지 않으면 그 길이 옳았는지 그릇된 길이었는지 알 수 없으니 일단 가보는 게 맞다.

넘어지고 다치는 치며 아플까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곁에 누군가 말동무가 되어주고 발자국을 내어 준다면 조금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우리 집에 첫 차가 생겼었다. 아빠는 종이로 된 지도만 보고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를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셨다. 없는 길로도 가보고 좁을 길도 가보면서 우리에게 참 많은 곳들을 보여 주셨다.  그런 두분은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하셨는데 양가의 도움이 없다보니 찟어지게 가난하게 사셨다고 한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늘 외상으로 가져다 우리들 먹이고는 월급날이면 고스란히 외상값 갚고 다시 외상으로 사셨던 하루하루.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 갔다가 집에서 열개에 몇전쳐주는 부업을 하기도 했고, 낮에는 공장으로 날 업고 가서 일하다가 깊은 밤이 되면 잠든 날 박스에 눕혀 재우고, 아빠가 회사 마치고 엄마 일하는 공장으로 와 나를 업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고 한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아팠을까? 캄캄한 터널 같은 하루하루를 지내오는 기분이 어땠을까?

아빠 엄마는 자식들 키우며 둘이 함께였기에, 어두웠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으셨기에, 지금의 모습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엄마 아빠께 만들어 드린 여행 사진첩

 두 분은 몇 년 전 퇴직하시고 40만 킬로나 탄 차를 처분하고 중고로 캠핑카를 마련하셨다. 요즘은 전국을 놀러 다니신다. 지역 축제를 철마다 즐기러 다니시고 강변이 오늘의 집이고, 바닷가가 내일은 당신들 집이 되신다. 그러곤 카톡 가득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신다. 아빠가 찍은 엄마와 자연의 아름다운 사진을, 그리고 지나가다 누군가가 ‘찍어 드릴게요’ 했을 법한 엄마 아빠(무장공비 같은 표정으로 찍힌) 사진들까지 수십 장씩.

올해만 백두산과 베트남으로 여행도 다녀오시고 어제는 거제도라고 전화가 왔다. 일에 메여있는 나에게 놀리듯 '여기 놀러 온나‘하신다. 웃음이 나온다. 기분이 좋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두 분도 길을 아셨을까? 모르셨겠지. 일단 한 발씩 내디뎌 보았겠지. 두드려도 보고 더듬어도 보고.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많이 들여다보지 못해도, 용돈 못 드려도, 두 분이 잘 알콩달콩 지내시기에 기쁘고 감사하다.


그래 아빠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상견례날 아빠는 시부모님께 "우리는 손주는 안 봐줍니다." 하셨었는데. 이게 다 엄마랑 재미있는 노후를 보낼 그런 계획이 아빤 다 있었구나.

지금 나는 아빠 엄마보다는 조금은 빠른 출발 선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 노후는 더 나은 모습일까? 끝을 알기 어려운 목적지까지 오늘도 해야 할 일들을 하나 둘 해치우며 하고 싶은 일을 향해 한 걸음 내딛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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