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개호(老老介護)의 초입에 서서

일상의 고찰 12 : 초고령사회에서 노부모와 공존하는 법

by 게을러영

"노노개호(老老介護)"


이 무거운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철학 비전공자로서, 일상에서 철학을 도입하여 '시민 철학자'로 불렸던 오가와 히토시가 지은 '인생의 오후에는 철학이 필요하다'를 통해서였다.

많은 철학자의 지혜 중에서도 노년기에 유익한 가르침을 모아 저자의 깊은 사유를 덧붙인 이 책은, 쉽고 명확함으로 많은 부분을 필사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중 와쓰지 데쓰로<나이 들어 가족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가족 윤리의 본질을 묻는 장이다.

가족의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누구나 짐작한 대로 '2인 공동체'인 부부로부터 시작한다. 2인에서 시작하여 부부 관계의 매개체인 자식이 개입되면 '3인 공동체'로 확장된다. 아이의 수와 상관없이 제삼자 카테고리에 포함된 자식이 성인이 되어 더 이상 부모의 명령을 듣지 않고 대등한 존재로 독립하면, 다시 '2인 공동체'로 회귀한다.


이미 1990년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造語)인 '노노개호(老老介護)''노인이 노인을 보살핀다'라는 서글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 이 말은 더 이상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다.

89세의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85세의 어머니가 돌보고 있는 우리 부모의 경우도 바로 한국 사회 노년들의 초상화이다.


35년 넘게 공노비로 조직 안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았던 나는, 올해 명예퇴직을 하며 그 규격을 벗고 자유로움을 즐기고 싶었다. 여유로워진 시간의 일부를 할애하여 늙은 부모님과 '효도'라는 헌정으로 함께 하고자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선택이었다. 타인의 눈에 비친 '가까이에 살며 생계 걱정 없는 우아한 백수'라는 타이틀이 나를 그 역할로 자연스레 이끌고 있었기에 말이다.


"남은 내 인생 즐기려고 명예퇴직을 했더니, 병원 동행이 필요한 노부모만 기다리고 있더라."

뼈 있는 이 우스갯소리가 곧 나의 현실이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옛말이 나를 해치지 않을 정도의 부름에는, '효도'라는 명분으로 그럭저럭 응답했고, 가끔 벌어지는 응급 상황에서도 두 분의 '인간 앰블란스'가 되어 효용의 노릇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현실적 명분과 타협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선은 확연히 갈린다.

자식의 보살핌과 부탁에 '고맙다'와 '미안하다'라는 말로 성인 자식의 대등함을 인정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여전히 그 시대 남자들이 가졌던 가장의 권리를 고수하고 있다. 의무를 다한 역할은 권리 역시 소멸되어야 하는 원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으셨다.

그 고집은 노(老)와 병(病)이라는 끔찍한 명분과 결합하여 더욱 단단해졌고, '금쪽이'의 모습으로 불쑥불쑥 드러나 어머니와 자식들을 힘들게 했다.


이제 '노노개호(老老介護)'의 초입에 들어선 나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늙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그러나 내게 더 시급한 질문은, 전혀 개선되지 않을 것 같은 금쪽이 아버지를 인정하고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다.


아버지의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언어폭력과 병환이 빚어내는 짜증 섞인 고집은, 효도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암초이다. 그의 권위의식은 스스로 쇠약해지는 존재에 대한 마지막 방어기제라는 걸 이성으로는 용납할 수 없지만, 그냥 포기를 가장한 인정이 차라리 편한 것은 아닐까 싶다. 다만 그것이 나의 삶을 파괴하지 않도록 '심리적 거리 두기'의 경계를 설정해야 하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정신적 지지와 실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초고령 부모와 노년의 자식이 찾아야 할 가장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존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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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음을 알립니다. (제목은 편집부에서 수정했네요. ㅠㅠ) https://omn.kr/2fzi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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