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2: 퇴직 교사의 세상 배우기
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김수현아트홀에서 진행하는 <2025 라디오방송 클래스>에 최종 합격을 했다는 것이었다.
라디오 기획 및 구성, 라디오 드라마 극본 작성에 관한 교육이라는 <라디오방송 클래스> 공고를 도서관 알림판에서 확인하고는 호기심에 지원했다.
그런데 그냥 신청이 아니라 지원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원 동기 등 몇 가지 란을 채워야 했는데 내 느낌대로 편안하게 썼다.
뭐든 지원해서 떨어지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떨어졌을 때 나의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이솝우화의 '신포도와 여우'처럼 자기 합리화를 하기 일쑤였는데... 여하튼 합격통지는 기쁘다.
첫 수업은 어제 시작되었다.
15명의 수강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였고, 진행하시는 분이 선정 요건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하면서 꽤 높은 경쟁을 제치고 선정되었으니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참여해 달라는 말은 초고속으로 내 가슴에 꽂히어 화자의 의도보다 더한 자부심을 갖게 했다.
강사이신 분은 라디오 구성작가로서 지역에서 휴먼다큐작가로 꽤 잔뼈가 굵으신 분이었다.
본인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섰는가부터 지금처럼 클래스가 없던 그 시절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제스타일로 배웠던 경험까지 잔잔한 어조로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그냥 흘려들었던 프로그램의 오프닝멘트가 얼마나 작가를 괴롭히고 24시간 내내 몰두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second, third 작가를 두고 있는 메인작가도 전체 비중의 50%를 차지할 만큼 아주 중요한 부분인 오프닝멘트는 직접 쓴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제일 친숙한 프로그램인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메인작가는 라디오의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손글씨로 오프닝을 작성한다고 했다.
'정오의 희망곡'은 라디오 역사상 처음으로 청취자가 보낸 문자로 오프닝을 함으로써 소통의 중요성과 함께 작가의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얘기에서는 우리 모두 미소가 번졌다.
후반기 수업에서는 직접 라디오 드라마 극본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팍팍 얹혀진 오리엔테이션은 바쁘게 끝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수강생들의 소개가 있었다.
일단 다들 너무 젊었고, 딱 봐도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그들 중 다수는 김수현 드라마홀에서 진행했던 글쓰기 수업강좌를 이수한 사람들이었고 수강생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프리랜서 작가 및 기획자, 시민에디터, 도슨트, 연극배우, 심리치료사, 경찰청 소속의 알코올중독 및 성폭력 상담사, 10년째 웹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등 너무 다양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해방된 공노비의 첫 외출의 느낌은 그야말로 작은 충격이었다.
일단 난 30년 넘게 ' ~연수'라는 단어만 익숙했다. 그 연수의 70% 이상은 자의가 아닌 타의, 즉 '필수연수'였기에 내 취향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이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소통메시지로 날라 오는 각 부서의 '필수연수' 목록은 꽤 많았고, 중간중간 담당자의 확인으로 점점 조여옴을 피할 수 없었기에 결국 클릭만 하는 요식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이제 해방된 공노비는 자유를 얻었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공노비일 때 대부분의 연수는 무료였거나 연수비가 지원되었기에 억지춘향으로 했던 것외에는 내가 원하는 연수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내가 부담해야 한다.
요번처럼 운이 좋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더 될까?
내가 원하는 건 남들도 원할테니 지원 후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선배 퇴직자의 말이 곧 나에게도 적용되겠지...
어쨌든 요번 기회는 It's my turn이다.
기회를 잡았으니 배워보자.
"전직 교사, 현직 백수입니다. 다른 분들만큼 화려한 경력도 없고 그동안 글쓰기와는 무관하게 살았네요..." 이렇게 소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말은 끝내 나오지 못하고 마음속에서만 우물거렸다...
#라디오드라마작가 #배움 #오프닝멘트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