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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Boston3. 아들 여친과의 하루나기

여행 4: 데이비드소로의 오두막과 'Walden Pond' 탐방기

by 게을러영

Visitor인데 Resident처럼 지내요.(3)


며칠 전, 아들의 출근길에 동승하여 나의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 아들은 불쑥 말을 꺼냈다.

"일요일에는 A랑 같이 Walden Pond에 갈 거예요. 거기 아주 물이 맑아서 수영하기도 좋고, 트레킹 코스도 잘 되어 있어서 걷기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딱 맞춤 코스가 될 거예요. 아마 가보시면 아주 반하실 겁니다."


월든호수고 뭐고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A와 같이...'라는 말만 귀에 맹맹 돌았다.


(엥? 같이 간다고? 난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 되었는데...)

그러나 튀어나온 말은.... "그래? 잘 되었네~ 좋아 좋아~~"


그렇게 일요일이 되었고 나는 아들의 여친을 만났다.

미국으로 석박사 과정 유학을 온 예쁜 독일아가씨는 수줍게 인사를 하였고, 나 역시 짧은 영어로 첫 대면을 하였다. 흔히 서양 여자들의 눈을 구슬같다고 하는데... 진짜 그랬다.

구슬 같은 눈!

사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구슬'이라는 말보다는 '다마'라는 일본어가 훨씬 많이 쓰였다. 햇빛 반사에 따라 잉크색과 에메랄드 색깔이 동시에 언뜻언뜻 보이는 그런 파란 다마 같은 눈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릴 때 본 '올훼이스의 창'이라는 만화에서 본 서양 여자의 눈은 왜 눈동자를 두 개씩 세로로 그렸는지 알 거 같았다. 진짜 투명한 또 하나의 빛이 보였다.

(뭘 이렇게 집요하리만치 자세하게 서술하는지.. 나 원 참...)


운전석의 옆자리를 내게 양보하는 배려에, 나 역시 '그 자리는 늬 자리야'라는 쿨함을 보여주듯 양보하였다. 그 아이는 영어가 서툰 나를 배려하듯 천천히 말의 속도를 조절하였고 그래서 그런지 모든 말이 다 알아들을 정도로 잘 들려 나도 대답과 물음을 하며 어색함을 조금씩 벗고 있었다.


여하튼 몇 번의 연애 경험이 있는 작은 애의 여친을 직접 대면한 것은 요번이 처음이라 나도 좀 떨렸다. 그러나 그 긴장감은 장소가 주는 편안함과 한나절을 같이 보낸 익숙함으로 시나브로 누그러지고 있었다.


Walden Pond가 어떤 곳인가?

바로 데이비드소로가 오두막을 짓고 살던 곳 아닌가?

나의 대학시절, 그때만 해도 Simple life가 생소했던 시절에 난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월든(Walden)》을 읽으면서 당시 내 실연에 대한 위로를 했던 기억이 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 월든 호수가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지도 몰랐다.


아들에게 여친과 같이 간다는 통보를 받는 차 안에서 나는 혹시 그 호수가 데이비드소로의 오두막이 있던 곳이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놀라며 "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와우.. 어머니 진짜 책 많이 읽으시네요.." 라며 감탄을 하였다.

칭찬에 뭐 기분이 좋기도 하고, 지 엄마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싶어 얼척없기도 하고..



주차장 바로 옆에 소로의 오두막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진짜 오두막은 소실되고 그것과 똑같은 규모와 내용으로 복원한 것이라는데, 정말 작아도 너무 작았다.

침대, 탁자, 의자 3개와 벽난로가 전부였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우리 기준으로 4.5평이라고 한다. 소로는 주변에서 직접 나무를 베고, 자재를 구해 오두막을 손수 지었는데 겨우 약 28달러 가 건축비의 전부였다고 한다. 지금 환율로 계산해 보니 4만 원 정도...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과 Simple life를 영위하는 삶이니 모든 것을 자연에서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로는 이곳에서 약 2년 2개월을 살면서 《월든》을 집필했다고 한다.




이곳이 진짜 소로의 오두막이 있던 장소이다.

첫 사진의 나무표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의도적으로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고, 삶이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을 배우며,
내가 죽을 때 진정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흐르는 대로 대충 살지 않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소로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었다. 세 번째 사진은 오두막 크기를 나타낸 표지석인데 규모의 작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숲사이의 길이 참 이뻤다.

적당한 그늘과 햇볕이 나무 사이사이로 비춰서 정말 걷기 좋은 길이었다. 새소리와 바람소리의 이중주가 참 넉넉하였다.

이 길을 소로가 걸었다고 생각하니 고요함 속에 청정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렇게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해먹에서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도 보였다.

산책로 중간중간 나무 표지판에 새겨진 『월든』의 문장들은 짧은 영어실력인 나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 있었지만 어느 것보다 울림이 컸다.

결국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가장 단순하다.'는 의미를 또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의 ‘길'은 ‘스스로를 찾는 길'이 아닐까 싶다.




산책로 왼편에는 항상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1 급수에만 산다는 무지개송어를 낚시해서 오는 미국인을 만나서 송어 구경을 할 정도로 물은 정말 맑고 깨끗했다. 빙하 활동에 의해 형성된 빙하호수라 그렇게 맑고 깨끗하다고 한다.


호수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힐링을 하고 있었다. 수영을 하거나 보트를 타기도 하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우리의 커플도 자연스럽게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갔다. 그들이 벗어놓은 옷 옆 앉아 막 사랑을 시작한 커플의 알콩달콩한 모습들을 보고 있었다. 대놓고 보면 그들도 나도 민망할 거 같아 그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오기 전까지는 일부러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점을 먹고 출발해서 그런지 오후 4시가 넘으니 슬슬 당이 떨어졌다. 젊었을 때는 몰랐던 당 떨어진다는 소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이이다 보니.. 힘들면 바로 녹아웃이다. 그 뒤 전개될 상황들을 알기에 나는 뭐라도 먹을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들한테 물었더니 지금 이 시간에는 기념품샵이 닫았을 것 같다고 했다.

'닫았다'가 아니라 '닫았을 것 같다.'이다.

결국 추측형이다.

걸어서 5분쯤 되는 거리라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 가봤더니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막대사탕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여서 1불짜리 막대사탕 3개와 항상 방문지마다 사는 기념마그넷을 사서 돌아왔다.


그 사탕의 달콤함은 곧 내게 안정을 주었다.

조금 전 물속에서 과감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젊은 커플들의 달콤한 모습들이 못내 부럽기도 하고 다시 안 올 내 젊음과 사랑에 대한 회한으로 인생무상까지 느꼈었는데...


알고 보니 당이 떨어져서였다.

일본 노인들의 우화집에 나온

'가슴이 뛰었다...................... 부정맥이다.' 같은 논리다.


나는 이제 그런 나이가 되었다.

다시는 못해볼 사랑보다 지금 내게 더 필요한 건 당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나를 달콤하게 해 줄 사랑을 더 이상 찾을 수는 없지만 사탕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당이 보충되니 젊은이들의 사랑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보였다.

'나도 해봤다!'라는 경험태로 충분히 만족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수석에서 엄청 재잘거리는 A를 보면서 나는 35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남편과의 연예 초기, 시어머니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셋이서 어디를 갔었는데.. 지금의 내 모습처럼 시어머니가 뒷 좌석에 앉아 계셨고, 나는 지금의 A처럼 옆에서 남편에게 쉴 새 없이 조잘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어머니는 운전 사납게 왜 그렇게 떠드냐며 야단을 치셨고, 나는 위축되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시어머니가 꼰대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내가 뒷좌석이 되어보니 그때의 시어머니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남편이나 지금의 아들이나 두 남자는 모두 초보딱지를 막 뗀 일 년 차 드라이버였기 때문이다.

아들은 쉼 없이 떠드는 A에게 대꾸하느냐 전방주시를 소홀히 했고, 그때마다 흔들리는 핸들과 뒷 차의 경적소리가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가 조용하게 아들에게 한마디 했다.

"앞만 보고 운전하면서 대꾸해라."


한국어를 모르는 A가 후에 아들에게 내 말의 의미를 물어봤을지 안 물어봤을지 그건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A는 그때의 나처럼 주눅 들지도, 눈치도 보지 않고 여전히 떠들고 있었기에 나는 꼰대 취급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월든호수는 나의 대학시절 잠언의 독서를 확인하고 대면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막 시작한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만 기억될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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