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7 : MFA Boston 관람기- 1
사족을 먼저 밝히는 변
이 글은 귀국 후 쓰는 것이다.
보스턴의 한 달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쓰고 싶었던 기행은 바로 MFA이었다. 보스턴에서 MFA 방문은 마지막 주에 이루어졌고, 감상을 쓰기에 그 내용은 너무 방대하고 벅찼다. 영어가 짧은 관계로 추후 그 내용을 찾아보고 소화해야 하는 부분들도 많았기에 느긋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바로 LA로 이동하여 내게는 글을 쓸 시간을 전혀 낼 수가 없었다.(이 부분은 다른 글을 통해 밝히겠다.)
그리하여 MFA의 감상은 귀국 후 당시의 내 기억과 느낌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쓰는 것임을 밝힌다.
내가 보스턴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단연코 MFA Boston(Museum of Fine Arts, Boston)이었다.
MFA Boston은 보스턴미술관을 일컫는 것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MET)과 시카고의 아트 인스티튜트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미술관의 하나로 꼽힌다.
어느 지역을 가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꼭 가보고 싶은 곳인 이유는 그림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집약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빡빡한 현실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상의 힘이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통하여 작가나 그 시대 사람들의 심정이나 느낌을 상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미 MET을 두 번이나 가서 그때의 충만함을 맛본 나로서는 이번 보스턴 방문의 제1픽을 이곳으로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듯 보스턴에 와서 제일 먼저 가고 싶었지만, 아드님의 조력 없이 혼자 다녀야 하는 내 입장은 지리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선뜻 나서기 쉽지 않았기에 그렇게 첫 주를 보냈다.
입장료도 꽤 비쌌기 때문에(성인기준으로 반 고흐 특별전 포함해서 34$(한화 4.7만원정도)) 뭔가 할인의 방법을 찾아서 가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미국의 현충일인 Memorial day(2025.5.26)에 선착순으로 무료입장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알아내고는 그날을 D-day로 잡아 감행했다. 그러나 그 조건은 나만큼 타인에게도 매력적이었기에 막상 그곳에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은 대기줄에 백기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틀 뒤 한산한 수요일 아침에 편안하게 입장하였다.
첫 관람은 마침 열리고 있는 반 고흐전부터 시작했다.
고흐빠인 내가 이미 한국에 있을 때 반 고흐전을 관람하고 그 감상을 썼다.(참고: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인정받았더라면 -쉼 3: 대전시립미술관 Van Gogh전을 다녀와서)
그리고 지금, 머나먼 미국 땅에서 다시금 그의 작품을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나를 들뜨게 했다. 두어 달 전, 한국에서 좋은 인연으로 소개받아 호감을 가졌던 사람을 전혀 예상치 못한 타국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처럼 마구 설레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체부 조셉룰랭>으로 룰랭가족들의 초상화전이다. 전시회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이 전시회의 주제와 방향성, 큐레이터의 의도 및 전시의 흐름을 알 수 있기에 전문을 해석해 보기로 한다.
[왼쪽]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
짙은 햇살과 노란 밀밭 사이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뜻밖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살던 우체부 조셉 룰랭과 그의 아내 오귀스틴, 그리고 세 아이, 아르망, 카미유, 마르셀이었습니다.
이 가족은 외로운 예술가에게 단순한 이웃을 넘어, 삶을 견디게 해준 따뜻한 존재가 되었고, 그 만남은 반 고흐의 그림 속에도 고스란히 새겨졌습니다. 고흐는 1년여의 시간 동안 룰랭 가족의 얼굴과 일상을 화폭에 담으며, 단순한 초상을 넘어선 우정과 연대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 속에서도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와 애정이, 그의 거친 붓질과 강렬한 색채 속에 녹아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런 반 고흐와 룰랭 가족의 특별한 관계를 조명하는 최초의 자리입니다.
초상화 연작뿐 아니라, 반 고흐가 깊이 매료되었던 초기 네덜란드 미술과 일본 목판화도 함께 선보입니다.
그가 바라본 세상, 그가 영향을 받은 예술, 그리고 그가 남긴 상징적인 작품들이 한데 어우러져, 반 고흐의 내면과 창작 과정을 새롭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의 그림 너머에 숨겨진 우정과 고독,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의 흔적을 이번 전시를 통해 천천히 따라가 보시길 바랍니다.
[오른쪽] < 반 고흐 - 룰랭 가족 초상화>
반 고흐는 의미 있는 관계를 갈망했습니다.
1888년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 아를에 도착했을 때, 그는 30대 중반으로써 교사, 설교자, 미술상과 서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드디어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화가로서 시작한 지 거의 8년이 흐른 시점에 드디어 그는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었고, 결혼하고 부모가 되는 오랜 꿈이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대신 창의적인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가 화가로서 가장 열정을 느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초상화, 그것도 바로 현대 초상화입니다."
반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100년 후 사람들에게 내 존재가 환영처럼 인식될 수 있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처럼 그대로 사물을 옮기기 보다는 열정적인 표현을 통해 현대적인 색채 취향을 반영하여 인물의 성격을 드러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를에서 이러한 열정은 그의 새로운 친구인 룰랭가족의 놀라운 초상화 연작을 그리는 것으로 발현되었고, 반 고흐는 우체부 조셉룰랭과 그의 아내 오귀스틴 그리고 그들의 세 자녀인 아르망, 카미유, 마르셀을 소재로 한 20여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남겼습니다.
그의 붓 끝에는 가족의 친밀함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 담겼습니다.
"나는 지금처럼 고통 없이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체적으로 고통을 겪더라도 인간애를 향한 열망을 잃지 않을겁니다.
아! 초상화야말로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온 것입니다."
입구에 있는 첫 작품은 우리에게도 너무 유명한 <노란 집>이다.
일단 너무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노란색이다.
그런데 그림의 묘미는 바로 같은 노란색이라도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여 다양함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녹색문을 지닌 마요네즈 빛 노란 집이 가장 이뻤고, 그 집 덧문의 녹색은 선명함과 명쾌함을 부추겼다. 또한 채도 낮은 하늘색이 노란 집을 더욱 부각했다.
'여기 제 집은 신선한 버터색으로 외벽을 칠하고 화려한 초록색으로 덧문을 달았어. 그 집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광장 한가운데 자리했지. 플라타너스, 협죽도, 아카시아 나무가 우거진 푸른 정원이 있고, 집안은 온통 하얀 회반죽으로 칠해져 있었고 바닥은 붉은 벽돌이 깔려 있었어. 머리 위로는 선명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숨 쉬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 파리에 있을 때보다 이곳이 훨씬 더 좋아.'
-반 고흐가 여동생 빌레미엔에게 보낸 편지 중, 1888년 9월 9일의 편지-
《노란 집 (거리)》, 1888년 캔버스에 유화
1888년 5월, 반 고흐는 아를에 ‘노란 집’을 빌렸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집이 아닌, 그가 꿈꾸던 예술과 우정의 공간이었습니다.
앞방은 작업실, 2층 작은 방은 그의 침실.
덧문을 닫고 조용히 머물며 그는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집 옆엔 분홍색 차양의 식료품 가게, 단골 식당, 멀리엔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철도 다리가 자리했습니다.
세상 끝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터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리는 걸 두려워해.
그래도 나는 그 두려움 속으로 온몸을 던지고 싶어."
노란 집은 그렇게 고독과 희망을 품은, 반 고흐만의 작은 세계였습니다.
(출처: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재단)
1888년 봄, 반 고흐와 우체부 조셉 룰랭은 같은 거리에 살았습니다.
카페 주인이 그들을 보고 형제 같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비슷한 머리색과 창백한 눈을 가진 두 사람은 카페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가까워졌습니다.
그 무렵 룰랭의 아내 오귀스틴은 막내딸을 임신한 채 친정에 머물렀고, 남겨진 룰랭은 기꺼이 고흐의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모델료를 감당할 수 없던 고흐는 음식과 음료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인물을 그리는 일보다 작품을 성장시키는 더 좋은 방법은 없어.
초상화를 그릴 때, 나는 내 안의 가장 진지하고도 훌륭한 무언가를 키워낼 수 있어."
그렇게 두 남자의 우정은 한 점의 초상화로 남았습니다.
[왼쪽] 1889년 여름, 병으로 붓을 잡을 수 없던 고흐는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그가 그린 이 초상화는 파란 배경과 의상, 거친 붓질을 통해 1년 전 우체부 롤랭의 초상을 소환하듯 되살려냅니다. 그 붓 끝에는 병마를 딛고자 하는 의지와, 기억 속 우정이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가운데] 고갱을 기다리며 그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했습니다. 초상화 속의 고흐는 마치 스님처럼 표현되었고, 그 모습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내면 깊숙한 곳의 성찰과 자조가 담겼습니다. 그 시기, 그는 자신을 가장 냉정하게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쪽으로 떠날 결심을 앞두고 그려진 이 자화상은, 동생 테오의 뒷받침 속에 비로소 안정을 찾은 순간의 기록입니다. 붓질 너머로 엿보이는 것은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다시 일어서려는 고흐의 의지였습니다.
[왼쪽] 막내 마르셀과 엄마 오귀스틴을 그린 이 초상화에서, 반 고흐는 아이의 얼굴에 모든 시선을 모읍니다.
갓 태어난 듯 생기 넘치는 마르셀의 모습은 따뜻하고도 섬세하게 그려졌고, 오귀스틴은 여백처럼 배경 속에 자리합니다. 그러나 그 여백은 비어있지 않습니다. 아이의 의존과 엄마의 돌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이, 두 사람 사이를 조용히 잇고 있습니다.
[오른쪽] 또 다른 이중 초상화에서 오귀스틴은 더는 주변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호자이자 중심으로, 그녀의 존재는 이번 작품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반 고흐는 인물과 배경, 돌봄과 의존, 숨김과 드러남 사이의 경계를 흥미롭게 탐구합니다. 그의 붓 끝에 담긴 것은 단순한 초상이 아닌, 어머니와 아이 사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조용한 유대였습니다.
[왼쪽] 1889년 봄, 반 고흐는 이 그림을 동생 테오에게 보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테오의 아내 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조는 자신이 임신한 아이도 저 작은 마르셀처럼 건강하게 자라길 바랐고, 언젠가 삼촌 고흐가 그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줄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마르셀은 반 고흐가 남긴 세 점의 단독 초상과 두 점의 어머니와 함께한 초상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반 고흐를 직접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가운데] 룰랭 가족을 그리는 일은 고흐에게 단순한 작업을 넘어선 기쁨이었습니다. 우체부 조셉 룰랭을 시작으로, 아내 오귀스틴, 그리고 막 태어난 마르셀까지. 처음엔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이 주를 이뤘지만, 점차 고흐는 아기의 독립된 존재감에 집중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가족을 넘어, 모든 연령대의 인류를 그리는 더 넓은 꿈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오른쪽] 1955년, 67세의 마르셀 룰랭의 사잔으로 그녀는 결혼 후 파리에 살았고, 딸 르네와 함께 아를로 돌아왔지만, 르네에겐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룰랭 가문의 직계는 조용히 끝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벽난로 위 액자 속에 우체부 부부와 '라 뵈르쇠즈' 초상화는 여전히 남아 사라진 가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왼쪽] 노란 집의 좁은 공간에 마주 앉아 고갱과 고흐는 나란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갱이 먼저 그린 이 그림은 마담 오귀스틴의 자세와 옷차림은 당연하게 고흐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흐는 고갱을 흠모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두 예술가는 경쟁과 영감, 고독과 동경을 서로 뒤섞으며 서로의 우정을 다졌습니다.
[오른쪽] 고흐는 오귀스틴을 선명한 무늬와 과장된 색채 속에 담았습니다. 그녀의 손은 요람으로 이어지는 밧줄을 쥐고 있고, 캔버스 한켠에는 '라 베르죄즈(요람을 흔드는 여인)'라는 제목을 새겼습니다. 그림 너머로 들려오는 건 자장가의 기억, 그리고 고흐가 꿈꾸던 위로입니다. 거친 바다 위 흔들리는 배에서조차, 어린 시절 들었던 자장가를 떠올리며 고독을 견디고 싶었던 그의 바람이, 이 그림 속에 고요히 머물러 있습니다.
1888년 가을, 반 고흐는 노란 집의 작은 침실을 자랑스럽게 동생 테오에게 소개했습니다.
"이건 그냥 내 침실일 뿐이지만, 이 공간의 색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해."
그의 바람은 분명했습니다.
단순하고 웅장한 색과 형태로, 이 방은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곳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침실 그림은 고갱을 기다리며 꿈꿨던 소박한 행복의 흔적이자 그가 원했던 안정과 휴식의 상징입니다.
벽에 걸린 두 개의 초상화는 어쩌면 자화상과 그리운 동반자의 얼굴로서 그의 작업과 삶에서 초상화가 차지하는 깊은 자리를 다시금 보여줍니다. 또 그 작은 방 안에는 평온을 갈망하던 한 예술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전시회의 끝 섹션까지 와서 나는 아쉬움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한번 더 처음부터 그림들을 차례차례 마주했다.
그림들을 눈에 담는다는 말이 이토록 절실하게 와닿은 적이 있었던가!
다시 못 올 기회라 더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그날 본 모든 그림들을 또렷이 떠올릴 순 없지만 그때의 감정과 마음을 채운 충만함은 여전히 내 몸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내가 미술관에 빠지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전에는 그냥 그림 구경이었다. 훅훅 지나가는 화면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 손으로 그리면서부터 비로소 남들의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선으로 드로잉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색을 쌓았는지, 명암은 어떻게 숨을 불어넣듯 표현했는지 자연스레 학습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매번 넘어지는 그 지점들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넘어서며 완성했는지를 들여다보며 좌절과 배움을 동시에 품을 수 있었다.
그림은 그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없는 망설임 그리고 지움과 그리기를 반복한 흔들림이 있다.
나는 고흐가 좋다.
사람들은 그의 선명한 색에 매료되지만 이제 나는 그 색 뒤에 숨어 있는 고독과 부서질 듯한 마음이 먼저 보인다.
'노란 집'도, '해바라기'도, '아를의 침실'도,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도, '올리브나무'들도.
사람들은 그의 강렬한 색채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나는 그의 외로움에 눈물이 고인다.
그가 고독을 견디기 위해 얼마나 선명한 색을 선택했는지를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랑은 그 고독의 틈에서 비로소 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림을 사랑하고 그의 외로움에 내 외로움도 숨긴다.
(참고: 파란색 부분은 '반 고흐 전시회<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체부 조셉룰랭>'의 공식 영문 설명을 기초로 필자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