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9: 모네와 그리스 미술 관람기, MFA Boston-3
그 넓고 넓은 미술관을 호기롭게 다니다 보니... 벌써 세 시간이 훌쩍 지났고, 슬슬 집중력도 떨어지고, 배는 고프고, 발바닥과 종아리 또한 뻐근해지고... '그만 볼까? 대충 볼까?' 본능의 속삭임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이럴 때는 뭐?
커땡시(커피가 땡기는 시간)가 필요하다.
커피를 마시며 못 본 공간과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욕심은 지혜를 가린다고 제일 중요한 체력을 안배하지 않은 결정적 실수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안내데스크에 있는 'Gallery Highlights"를 발견하고는 이것 위주로 관람하면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영어 외 7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MFA Boston의 지도 중 한국어로 된 것을 발견하고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의욕이 앞서서 입장하자마자 여기저기 다니느냐 안내데스크에 있는 이 소중한 자료를 늦게 발견한 것이 좀 아쉬웠지만, 이미 고흐전에서 두 시간을 넘게 소비한 나는 특별한 핑곗거리를 찾을 수도 없었다.
가장 정수라고 할 수 있는 2층의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그리스 미술을 먼저 보자고 결정을 하자 한결 다리가 가벼워졌다.
기력을 회복한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유럽 궁정처럼 화려한 대리석으로 된 입구는 웅장함과 고급스러움을 장착했다.
<William I. Koch Gallery(Gallery 250)>라는 문구가 대리석 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곳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의 회화와 장식미술이 어우러진 전시 공간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은장식들이었다. 한쪽 벽면에 103점의 하노버 실버 컬렉션(왕가의 식기, 촛대, 트럼펫 등)이 18피트 높이로 피라미드 형태로 전시되어 있어 왕실의 화려함의 극치가 곧바로 전해진다.
그렇게 화려한 은제품에 홀려 사치의 극치를 맛보다가 고개를 돌려 맞은편 벽면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거기에는 반전이 숨어 있었다.
여섯 점의 작품 중 나의 눈이 가장 오래 머문 것은 바로 호세 데 리베라의 <<Saint Onophrius(성 오노프리오)>였다.
나뭇잎으로 간신히 하반신을 가리고, 헝클어진 머리와 갈비뼈가 드러나는 바짝 마른 몸과 늘어지는 살 그리고 움푹 들어간 빰!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한 은둔자 성인의 모습은 맞은편 벽면 실버컬렉션과 대비되어 더욱 충격을 주었다.
더욱이 성인 오노프리오 앞에 놓인 두개골은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하고 화려함을 비웃는 '메멘토모리(Memento mori :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였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화려함과 죽음이 결국 우리네 인생이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옮겼다.
참으로 기가 막힌 전시 구성임을 깨달으며 다음으로 찾은 방은 바로 모네 갤러리(Monet Gallery)였다.
모네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중학교 미술 시간에 모네는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의 대표라고 배웠을 당시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중학교 1학년생의 지식에서의 인상은 '인상 쓰지 마'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 도대체 인상주의가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무조건 '모네-인상주의'로 외웠다.
만약 내가 그 당시 선생님이었다면 인상의 한자인 印象과 영어 Impressionism을 함께 설명하였을 것이다. '형상을 표현할 때 순간적인 인상(분위기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인상주의라고 해. 하나의 사물이 빛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잖아! 같은 연못이라도 새벽의 모습과 한낮의 모습 그리고 해 질 녘의 모습이 다르지? 또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의 느낌도 다 다르겠지? 당시의 다른 화가들은 그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비해,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의 반사와 색채의 변화를 빠른 붓질과 생생한 색으로 표현했어. '라고...
<센 강의 아침 :Morning on the Seine>이란 같은 제목의 두 작품은 인상주의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왼쪽은 연한 파스텔 톤의 블루와 라벤더, 연초록등 맑고 부드러운 색조인데 비해, 오른쪽은 딥블루와 회색이 섞인 중후하고 가라앉은 느낌이다. 그런 색채의 대조가 밝고 투명한 새벽의 상쾌함이 살아 있는 왼쪽 작품과 색감이 묵직하고 안개가 짙은 몽환적인 느낌의 오른쪽 작품을 바로 비교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크뢰즈 계곡:Valley of the Creuse> 시리즈도 날씨에 따른 '같은 장소, 다른 느낌'이 확연히 비교되는 작품이다.
흐린 날에 그린 왼쪽 작품은 거친 언덕과 계곡이 어두운 보라와 파랑 그리고 붉은 톤으로 묘사되어, 차분하지만 무겁고 침잠된 분위기를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비를 잔뜩 품은 무거운 구름을 잘 표현했다. 흐린 날이다 보니 경계가 흐릿해진 것도 느낄 수 있다.
반면 오른쪽 작품은 햇살이 비치는 돌과 풀 그리고 언덕을 명암 대비가 선명하게 그렸다. 오후 햇살이 물 위에 반짝이며 반사되는 느낌을 너무 잘 살렸다. 활력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빛과 반사가 너무 잘 표현되어 마치 반대편 언덕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작품은 따로 있었다.
바로 <라 자포네즈(일본 의상을 입은 카미유 모네):La Japonaise(Camille Monet in Japanese Costume)>이다. 이 작품은 모네의 아내인 카미유 모네의 일본 기모노 차림을 그린 작품으로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자포니즘(Japonisme)' 열풍을 반영한 화제작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일본이 개항하며 일본 미술과 공예품에 대한 열광적인 수집과 관심이 유행하였다. 이를 반영해 프랑스 예술가들이 일본풍의 소재, 패턴, 의상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포니즘'이다.
이 작품에서도 모네의 부인인 카미유 모네가 일본풍 자수와 무늬로 장식된 선명한 붉은 기모노를 입고 익살스러운 표정과 포즈로 중앙에 서 있는데 특히 여러 모양의 부채가 배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아주 특이했다. 서양인의 눈에는 이국적인 이 그림이 아주 인기가 높아서 마그넷과 여러 기념품의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사실 모네 하면 빛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자연주의 풍경화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자포네즈는 생뚱맞다 싶을 정도로 확실히 튄다. 모네가 그렸다고 쓰여 있지 않았다면 모네 그림이라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이 그림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과 함께 유럽 여성이 동양 여성을 흉내 내는 점이 인종적 고정관념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모네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마주하며 근 사십 년 동안 머리로만 이해해 온 인상주의 화풍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백문이불여일견'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 바로 MFA Boston의 위력과 스케일이 아닐까!
다시 시작된 발바닥의 통증은 좀 더 강도가 세졌지만, 그 발걸음의 수고가 나의 가슴과 머리에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 주었으니 통증은 더없이 값지고 견딜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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