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파괴에 대한 반성
갈등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葛(칡 갈)
藤(등나무 등)
칡과 등나무는 둘 다 덩굴식물이라 한 번 서로 얽히면 풀기가 굉장히 힘들어서,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나 감정이 뒤엉켜 쉽게 풀리지 않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일상화되어 있다.
예전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칡즙을 많이 먹었는데 열 내림의 효용이 커서 지금도 약국에서 '갈근탕'이란 쌍화탕 비슷한 것을 판다. 갈근(葛根)은 칡뿌리를 말한다.
추석이 임박하니 벌초도 숙제 중 하나이다.
지난 주말 남편의 벌초 행사에 동행했다.
얼굴도 못 본 남편의 외조부 산소 벌초 작업에 몇십 년 동안 동행하고 있다. 예전엔 스트레스였지만 지금은 봄에는 따뜻해진 날씨에, 가을에는 선선해진 날씨에 나들이라 여기고 가볍게 가고 있다.
그런데 산소 옆에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향나무에 칡넝쿨이 완전히 덮혀 있는 것을 목도하였다.
얼마나 힘이 센지 향나무의 방향을 아예 바꿔서 누르고 있는 형상이었다.
귀농한 남편이 설명한 칡넝쿨의 해악은 생각보다 컸다.
어떤 나무든 칡넝쿨이 덮히면 원래 나무는 고사한다는 것이다. 방법도 잔인하다.
무성한 칡덩쿨의 이파리가 완전히 덮어 원 나무의 광합성을 방해하고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가는 줄기는 힘과 무게가 상당하여 원 가지를 비틀어 결국은 부러뜨린다고 한다. 아무리 줄기를 잘라도 칡뿌리의 영양분 때문에 싹을 또 틔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향나무 아랫 부분의 칡 가지를 예초기로 잘랐다.
약자인 향나무에 감정 이입된 나는 "저기도 있어, 저기야." 라며 어둠 속에 숨은 칡넝쿨을 고발하는 충실한 제보자 역할을 하였다.
모처럼 힘을 쓴 남편은 땀을 닦으며 칡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조만간 다시 와서 또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일단 보이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우리는 기세등등하게 하산하였다.
명퇴하고 농사짓는 친구에게 그 경험담을 알렸더니,
- 밭으로 기어 내려오는 뒷산의 칡과 환삼덩굴,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낫으로 쳐내는데 세 시간 걸렸어요.
일 년에 세 번씩은 해야 해요. 안 하면 밭으로 넘어와서 작물을 다 휘감고 올라가 농작물 다 망쳐요.
내용에서도 지긋지긋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귀가하는 길.
정체되어 꼼짝도 못 하는 차 안에서 칡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관점에서야 향나무를 감아 고사시키고 농작물을 해치는 칡넝쿨은 분명 '갈등'의 주범이다. 하지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기세등등하게 뻗어 올라가는 것은 그저 칡의 생존 방식일 뿐 악의는 없다. 넘쳐나는 진액과 강한 넝쿨은 그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생존의 수단이다.
일조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농작물을 이용하는 것 역시 본능이다.
'나쁜 식물'이라는 낙인을 찍고 해가 되는 존재로 명명한 것은, 모든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유불리를 따지는 이기적인 태도일 뿐이다.
칡은 단지 자연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보자.
겨우 몇 포기의 작물을 휘감아 올라가는 칡에게는 '유해 식물'이라며 잔인한 벌초를 가하면서, 정작 숲을 남벌하고 지구의 생명력을 단축시키는 존재는 과연 누구인지? 인간이야말로 이 거대한 생태계의 유해 동물이 아닐까 싶다.
이 자연 속에서 칡은 죄가 없다.
우리가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넝쿨은 자본주의에 눈이 벌건 인간의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