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으면

녹아내린 마음의 자리

by Helia

눈이 녹으면, 가장 먼저 마음이 먼저 젖는다. 하얗게 쌓여 있던 계절이 사라질 때마다 나는 늘 묘한 감정을 마주한다. 흘러내리는 건 눈물인지, 겨울 내내 품어두었던 숨결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눈이 녹는 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풀려나간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랫동안 묶어둔 끈을 고요하게 풀어내는 듯한 기분. 그 결이 너무 부드러워 그동안 왜 그렇게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지 되묻게 된다.

눈이 녹으면 오래된 기억도 함께 깨어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울던 어린 시절의 창문, 겨울이 깊어갈수록 잠잠해지던 길거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를 감싸던 침묵의 무늬까지.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홀로 견디던 마음이 여린 기척을 드러내듯이 고개를 내민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은 다른 계절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오직 눈이 녹는 날만, 마치 물속에서 숨을 참고 올라오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느 해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나는 버스 창가에 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묘한 위로를 받았다. 내 안에서 오래 묵힌 슬픔이 녹아내리는 속도와, 유리창에 흐르는 물방울의 속도가 묘하게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눈이 녹는다는 건 단순히 계절이 바뀌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좋다는 신호라는 것을. 얼어붙었던 마음이 ‘이제 흘러가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방식이라는 걸.

겨울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지고, 표정이 단단해지고, 말수가 줄어든다. 나 역시 그랬다. 차갑게 굳은 공기 속에서 나도 얼어붙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 순간에는 어깨까지 서늘해지는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 세상이 제 몸을 놓아주듯 조금씩 온도를 바꾼다. 그 변화가 아주 느리게 다가오는데도 이상하게 바로 느껴진다.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마음은 날카롭지만, 아프지 않은 방향으로 열린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없이 스르륵 부드럽게 무너지는 것처럼.

눈이 녹으면 풍경의 깊이가 드러난다. 하얀 것들에 가려졌던 자잘한 돌멩이, 부서진 나뭇가지, 지나간 발자국, 그리고 내가 몰랐던 흔적들. 모두가 숨을 들이쉬듯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감춰둔 감정이 모습을 드러내고, 애써 지워둔 문장들이 다시 떠오르며, 잊었다고 생각한 이름들이 여린 목소리로 살아난다. 완전히 잊힌 줄 알았던 마음은 눈이 녹는 날이면 아주 조용하게 되돌아온다. 마치 “나는 아직 여기 있어”라고 말하듯.

눈이 녹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나도 이렇게 녹아내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겨울 내내 단단하게 버텼던 마음이 기온의 변화에 맞춰 서서히 풀리고,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도 모르게 흐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견디기 위해 꽉 다물었던 마음이 계절의 체온에 이끌려 하나씩 풀리는 과정. 그 과정은 오래 걸리지만, 딱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아, 내가 드디어 조금 가벼워지고 있구나.”

눈이 녹는 날이면 유난히 흙냄새가 짙다. 세상이 재채기를 하듯 촉촉한 숨을 내뿜는다. 그 냄새를 맡으면 이유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다시 읽는 순간처럼, 읽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문장을 덮고 나면 한참 동안 여운이 남는 그런 순간. 흙냄새에는 그런 힘이 있다. 겨울 내내 눌러두었던 감정의 덩어리들이 서서히 풀릴 준비를 하는 소리 같아서.

눈이 녹으면 강물도 깊어진다. 겨울 동안 쌓인 것들이 한꺼번에 녹아 내려와 물살을 흔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쌓아둔 말들이 떠오른다. 하지 못한 말, 하지 않아서 다행인 말, 하지 않아 후회되는 말. 다 말해버리면 좋을까, 아니면 이대로 물처럼 흘러 보내는 게 나을까. 강바람이 불어오면 그 고민도 잠시 흐릿해진다. 물결은 결국 제 길을 찾아 흐르고, 나도 결국 어떤 선택이든 그 계절에 걸맞은 흐름을 만들겠지. 세상 모든 건 결국 흘러야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이니까.

어느 해 겨울 끝자락, 나는 집 앞 골목에서 우연히 바닥에 남아 있던 작은 눈사람을 보았다. 이미 반쯤 녹아 눈사람의 형태라 부르기 어려웠지만, 그 무너져가는 모습이 왠지 내 마음 같아 한참을 바라봤다. 그렇게 녹아내리면서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새가 이상하게도 다정해 보였다. 그날 나는 그 눈사람에게서 아주 단순한 진실 하나를 배웠다.
“사라지는 게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방식일 수도 있다.”

눈이 녹으면 사람들의 얼굴도 달라진다. 겨울 내내 목도리 속에 숨겨 두었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늘어진 어깨도 조금씩 펴지고, 무겁던 숨소리가 가벼워진다. 벽처럼 굳어 있던 침묵이 부드러워지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온기가 생긴다. 그러한 변화를 보며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도 결국 계절의 일부라는 것을. 차갑게 굳어 있을 때가 있지만, 눈이 녹으면 반드시 풀린다는 것을.

눈이 녹으면 나는 나를 다시 바라본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겨울 동안 무엇을 버티고 무엇을 놓아야 했던 것인지. 그런 질문들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때로는 그 질문이 벅차기도 하지만, 눈이 녹는 날만큼은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계절, 조금은 아픈 대답도 받아들일 수 있는 계절. 봄이 오기 전 가장 투명한 순간이기도 하니까.

눈이 녹으면 나는 ‘변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천천히 준비된다. 눈이 쌓이는 동안 이미 녹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도 상처를 품은 동안 이미 치유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을 뿐, 마음은 늘 계절보다 조금 일찍 다음을 준비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멀어지는 순간도,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이는 순간도, 모두 같은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 녹고, 스며들고, 흘러가고, 다시 피어나는 흐름.

눈이 녹으면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조금 더 단단해진 듯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더 부드러워진 사람. 오래된 슬픔을 품고 있지만 새롭게 기뻐할 여지도 가진 사람. 작년에 겁내던 일도 올해는 조금 덜 두려워하는 사람. 변화는 그렇게 눈이 녹는 속도로 다가온다. 서두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딱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나는 해마다 기다린다. 눈이 녹는 날을. 겨울의 끝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쌓아두었던 감정들이 물결이 되어 흘러갈 때, 나는 또다시 나를 새롭게 만들 힘을 얻는다. 눈이 녹아 만들어진 작은 물웅덩이 속에서 흔들리는 하늘처럼, 나도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본다. 조금 더 빛나는, 조금 더 살아 있는, 그런 새로운 나를.

눈이 녹으면, 결국 나는 다시 살아난다. 녹는다는 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준비라는 걸, 이 계절은 매번 내게 알려준다. 계절의 체온이 마음을 들어 올리는 이 시기에 나는 가장 솔직해지고, 가장 순해지고, 가장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계절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눈이 녹아 흐르는 길 위에서 나는 또 한 번 내가 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으니까.

눈이 녹으면, 마음도 녹는다. 그리고 녹은 마음은 결국 새로운 계절을 향해 흘러간다.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올해도 나는, 천천히 녹아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한다.
“눈이 녹는 동안 나는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