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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

한 얼굴로는 살 수 없어서

by Helia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두 얼굴을 쓴다. 웃으며 건네는 말 뒤에 계산이 숨어 있고, 다정한 손길 뒤에 거리 두기가 겹쳐 있다. 우리는 그걸 위선이라 부르기도 하고, 어른스러움이라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양면을 선택한다. 한쪽 얼굴만으로는 이 사회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걸 너무 일찍 배워버렸기 때문이다.

양면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들킬 가능성을 품고 있어서다. 누구나 스스로를 일관된 존재로 믿고 싶어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고, 이런 선택을 해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같은 상황에서도 상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고, 이익 앞에서는 신념이 잠시 옆으로 비켜선다. 그걸 비겁함이라고 단정하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관계와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앞면과 뒷면을 함께 키운다.

나는 한동안 이중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평가를 가장 경멸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솔직하려 애썼고,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솔직함이 나를 더 자주 다치게 했다.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상대는 그걸 존중하기보다 이용했다. 선을 긋지 못하는 다정함은 호의가 아니라 허점이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조금씩 다른 얼굴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친절하지만 거리를 두는 얼굴, 웃지만 기대하지 않는 얼굴.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방어였다.

관계 속에서 양면은 특히 또렷해진다.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는 가장 부드러운 말과 가장 날카로운 말을 동시에 건넨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상처를 남기고, 걱정한다는 이유로 통제하려 든다. 타인을 위하는 얼굴과 스스로를 지키는 얼굴이 충돌할 때, 사람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을 감추기 위해 더 공손해지거나, 반대로 더 냉정해진다. 어느 쪽이든 진심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한쪽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이중성을 비난하지만, 정작 스스로의 양면에는 관대하다. 내가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고, 남이 그러면 계산적이라고 말한다. 그 기준의 차이가 관계를 서서히 마르게 한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이해하기 싫은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그것이 인간의 기본값에 가깝다. 그래서 완전히 투명한 사람은 신뢰받기보다 부담이 된다. 너무 솔직한 사람 곁에서는 나의 숨겨진 면이 더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 또한 양면으로 작동한다. 좋았던 순간은 미화되고, 불편했던 장면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어느 날 불쑥 떠오르는 장면들은 대개 그 반대편을 데리고 온다. 웃던 얼굴 뒤에 숨었던 침묵, 행복했던 시절에 눌러두었던 불안. 우리는 기억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 기억은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 한쪽만 꺼내보면 반드시 다른 쪽이 따라온다. 그게 기억이 가진 양면성이다.

일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 성실함은 미덕이지만, 그 이면에는 불안이 있다. 쉬면 뒤처질 것 같고, 멈추면 버려질 것 같아서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열심히 하는 얼굴과 지쳐가는 속마음은 동시에 존재한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혼자 있을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 모순을 견디는 힘이 어른스러움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타협에 가깝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존재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선자로 몰아세우거나 타인을 심판하게 된다. 양면을 가진다는 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한 면만 고집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유연함이 없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만으로 타인을 다치게 하기 쉽기 때문이다. 양면은 균형을 위한 장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반대편에 무게를 싣는 것처럼.

나는 이제 사람을 볼 때 한 얼굴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친절한 사람에게서 냉정을 보고, 냉정한 사람에게서 상처를 짐작한다. 그게 용서라기보다는 이해에 가깝다. 이해한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이 왜 그런 얼굴을 선택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여유다. 그 여유가 없을 때, 관계는 빠르게 단절된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의 다정함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계산적인 순간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둘 다 나라는 것을. 한쪽만 남기고 다른 쪽을 지워버리면, 나는 더 이상 온전하지 않다. 다정함은 계산이 있기에 오래 유지되고, 계산은 다정함이 있기에 인간적인 선을 넘지 않는다. 서로를 견제하며 나를 이루고 있다.

양면을 인정하는 일은 불편하다. 이상적인 자아상을 내려놓아야 하고, 스스로를 미화하던 습관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지나야 비로소 사람은 조금 덜 흔들린다. 나는 완벽하지 않고, 일관되지 않으며, 때로는 모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저 인간일 뿐이다.

사람의 양면은 숨겨야 할 흠이 아니라, 드러내고 관리해야 할 구조다. 앞면만 내세우다 보면 언젠가 뒷면이 터져 나온다. 그때 관계도, 신뢰도 함께 무너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두 얼굴이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덜 아프다. 양면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타인의 양면 앞에서도 함부로 돌을 던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왜 그렇게 이중적이냐고. 대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그 얼굴을 꺼내게 했을까. 그리고 나 역시 어떤 얼굴로 서 있는지를 조용히 돌아본다. 양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은 조금 더 솔직해진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게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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