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고 추는 춤
연인의 시작이 왈츠라면, 탱고는 끝난 사랑의 춤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내가 여름을 택해온 이유가 선명해졌다. 나는 언제나 끝을 모르는 시작보다, 끝을 알고도 다가서는 순간에 더 오래 머물렀다. 봄의 왈츠는 안전하다. 손을 살짝 얹고, 서로의 체온을 가늠하며 둥글게 돈다. 약속은 많고, 말은 부드럽고, 미래는 자연스럽게 전제된다. 시작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이 유예된다. 아직은 몰라도 되는 것들, 지금은 묻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 그래서 봄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종종 가볍다. 꽃잎처럼 쉽게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 여름의 탱고는 처음부터 솔직하다.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춤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음악이 끝나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질 거라는 걸. 그래서 탱고는 밀착한다. 망설일 틈 없이 가까워지고, 애매한 말은 허용되지 않는다. 끝을 아는 사랑은 오히려 시작보다 정직하다. 희망 대신 합의가 있고, 기대 대신 각오가 있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는 거짓말이 금세 들통난다. 숨이 가쁘고, 땀이 나고, 감정은 과열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람은 가장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늘 그런 사랑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은 관계보다, 이미 금이 가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는 관계에서 더 많이 웃고, 더 깊이 침묵했다. 탱고를 추는 연인들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무게를 나눈다. 오늘 밤이 끝나면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서로를 더 단단히 붙잡게 만든다.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은 이상하게도 최선을 다한다. 미루지 않고, 숨기지 않고, 덜 사랑하는 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시작은 설레어하고, 사랑은 봄 같아야 한다고. 하지만 설렘은 대개 기대에서 나오고, 기대는 쉽게 실망으로 변한다. 나는 더 이상 기대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대신 확인을 택한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보고 있는지, 이 순간을 함께 견딜 수 있는지. 여름의 탱고는 그 질문을 즉각적으로 던진다. 다가올 계절을 묻지 않고, 지금의 체온을 묻는다. 그래서 나는 여름을 선택했다.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용기, 그 잔인한 정직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별은 실패가 아니다. 적어도 여름의 사랑에서는 그렇다. 끝났다는 사실은, 그만큼 진심으로 다가섰다는 증거일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흐지부지 사라지는 관계보다, 뜨겁게 타올랐다가 재가 되는 편이 나는 더 낫다. 탱고를 추고 난 뒤 남는 통증은 분명하다. 발목이 욱신거리고, 손목이 아프다. 하지만 그 고통은 허상이 아니다. 분명히 함께 움직였고, 같은 리듬 위에 있었다는 흔적이다.
봄의 왈츠는 언제든 다시 출 수 있다. 상대가 바뀌어도, 음악이 달라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의 탱고는 다르다. 상대가 바뀌면 춤도 완전히 달라진다. 그 사람의 숨결, 버릇, 멈칫거림까지 모두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탱고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 여름, 그 사람, 그 순간에만 가능한 춤이다. 아마 그래서 더 아프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이제 봄을 경계한다. 시작이라는 말 뒤에 숨은 회피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차차, 조금 더. 그런 말들은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닮아 있다. 반대로 여름의 사랑은 즉답을 요구한다. 지금인지 아닌지, 함께할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 태양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과장 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여름의 탱고는 거칠지만 정확하다. 남는 것은 적지만, 남은 것들은 모두 진짜다.
끝을 아는 사랑을 선택한다는 건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신뢰에 가깝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 나는 더 이상 오래 지속되는 관계만을 성공이라 부르지 않는다. 짧았지만 뜨거웠던 시간, 헤어짐 이후에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남긴 관계를 존중한다. 여름의 탱고는 그런 사랑을 닮았다. 시작보다 끝이 더 선명한 사랑, 마지막까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본 관계.
봄날의 왈츠보단, 여름의 탱고.
이 문장은 이제 취향이 아니라 나의 연애사이자 삶의 태도다. 둥글게 돌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끝을 알면서도 밀착하는 선택. 언젠가 음악이 멈추고, 각자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더라도 괜찮다. 나는 알고 있다. 적어도 그 여름, 나는 회피하지 않았고, 미루지 않았고, 사랑을 예행연습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여름의 탱고를 떠올린다. 끝을 향해 걷는 춤이었기에, 오히려 가장 진실했던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