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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풍경

흩날리는 순간의 기적

by Helia

벚꽃이 흩날리는 풍경은 매년 같지만,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는 매번 달라진다. 봄이 오면 나는 늘 그 길로 향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기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벚꽃나무가 일렬로 이어진 가로수길, 바람 한 줄기가 스치면 꽃비처럼 쏟아지는 분홍빛, 그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람들의 표정. 나는 그 모든 장면이 좋다. 아니, 좋아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그 길은 매년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벚꽃길에 들어서면 시간의 속도가 느려진다. 도시의 소음이 살짝 뒤로 밀리고, 마음의 불안도 조금은 보드라워진다. 꽃잎이 천천히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생각이 잔잔한 호수 위에 떨어진 작은 조약돌처럼 조용히 가라앉는다. 풍경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면, 벚꽃이 흩날리는 그 장면은 아마도 가장 부드러운 속삭임일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그 길을 걷는다. 카메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감정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평소에는 흘려보내던 빛을 멈춰 세우고, 지나가는 바람의 흔들림을 붙잡고, 떨어지는 꽃잎의 속도를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마다 깨닫는다. 아, 나는 지금 여기 살아 있다.
사람들은 풍경을 찍지만, 나는 풍경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찍는다.

벚꽃이 흩날릴 때 풍경은 비로소 완성된다. 꽃잎은 바람을 타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는데, 그 모습에는 규칙이 없다. 어떤 꽃잎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고, 어떤 꽃잎은 길게 원을 그리며 공중을 떠돈다. 그 다양함이 좋다. 삶과 닮아서. 오래 머무는 것들도 있고,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결국은 땅에 닿아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나는 벚꽃길을 걸을 때마다 묘한 침묵과 마주한다. 바람이 멈추면 꽃잎도 멈추고, 사람들의 속삭임도 잠시 끊기며, 길 전체가 하나의 숨처럼 고요해진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한 장의 사진으로 변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정적은 잠깐이지만, 그 사이로 마음속 문장 하나가 피어난다.
“멈추는 순간이 있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 문장은 해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떤 해엔 위로였고, 어떤 해엔 다짐이었으며, 어떤 해엔 단순한 깨달음이었다. 풍경은 변하지 않지만, 풍경을 해석하는 내 마음은 변한다. 그래서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이 지루하지 않다. 해마다, 아니 매번 걸을 때마다 조금 다른 나를 만나게 되니까.

사람들은 벚꽃을 ‘잠깐 피고 바로 지는 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그래서 더 사랑받는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벚꽃의 아름다움은 ‘지나기 때문에’가 아니라 ‘흩날리기 때문에’ 더 깊다.
흩날리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다.
흩날리는 것은 제때 떠날 줄 아는 것이다.

그 사실을 벚꽃이 온몸으로 보여준다.
꽃은 자신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세상에 모든 것을 내놓는다.

그 모습에서 나는 어떤 용기를 배운다.
나도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마음, 내려놓아야 하는 관계, 끝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벚꽃을 보며 깨닫는다.
그리고 다음 계절이 다시 온다는 사실도 함께 배운다.

어느 날, 바람이 거세게 불어 꽃잎이 폭우처럼 쏟아진 적이 있었다. 분홍빛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장면 속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몽환적이면서도 생생했고, 사라지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들지도 못한 채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단 한 문장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름답게 사라질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 두려울까?”

그 장면은 지금도 나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벚꽃길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매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대답을 얻어 가게 한다. 풍경이 나에게 생각을 준다. 꽃잎은 시간을 준다. 바람은 용기를 준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품고 걸음을 이어간다.

때때로 혼자 벚꽃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본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카메라를 손에 든 채 한 장면에 오래 머무는 사람, 벤치에 앉아 꽃잎이 쌓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벚꽃길에서만큼은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풍경이 곁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길을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든 이의 것인 풍경’이라고 부른다.

가끔은 생각한다.
“왜 나는 이 길을 이렇게도 사랑하는 걸까?”

여러 이유가 떠오르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이 길에서는 나를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지로 밝게 만들 필요도, 슬픔을 애써 숨길 필요도 없다.
벚꽃은 어떤 감정도 받아들인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지침이든, 기대든.
그저 꽃잎 하나 더 흩날려 그 감정을 덮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벚꽃길을 걸으면 나를 조금 더 믿게 된다.
꽃잎이 어깨에 떨어질 때,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들 때—
나는 깨닫는다. 내가 이 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봄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

벚꽃은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지만, 나는 해마다 조금씩 다른 마음으로 그 길을 걷는다.
그 차이가 바로 내가 살아온 시간이다.

길 끝에 다다르면 바람은 마지막으로 꽃잎을 들어 올리고,
그 꽃잎들은 잠시 하늘을 날다가 이내 사라진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다시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에도 충분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길을 찾는다.
올해도,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벚꽃이 흩날리는 가로수길은 내게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자리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매번 다시 살아난다.
흩날리는 순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벚꽃은 짧게 머물지만, 그 짧음이 나를 오래 살아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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