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장|잠들기 전 생각

잠은 오지 않고 생각만 깨어 있을 때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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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노노 (Luigi Nono)
〈…sofferte onde serene… per pianoforte e nastro magnetico〉


잠들기 전 생각이라는 말은 참 점잖다. 사실은 그냥 잠을 못 자는 상태일 뿐인데, 굳이 그렇게 포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잠이나 푹 자면 좋겠는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눈만 감으면 생각이 먼저 깨어난다. 몸은 분명 하루를 다 써버려서 녹초인데, 머릿속은 이제야 준비 운동을 마친 사람처럼 분주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생각은 그런 약속을 전혀 믿지 않는다.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생각은 멈출 줄을 모른다. 처음에는 사소하다. 낮에 했던 말 한마디, 괜히 덧붙였던 표정 하나. 그게 왜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모르겠는데, 생각은 그 지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 말 대신 이렇게 말했어야 했나, 그때 조금만 더 웃었으면 어땠을까. 이미 끝난 장면을 다시 재생하면서, 머릿속에서는 끝없이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낸다. 이미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손잡이를 다시 잡아보는 일. 열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은 자꾸만 그쪽으로 간다.

잠들기 전의 생각은 유난히 나에게 가혹하다. 낮에는 대충 괜찮은 사람처럼 하루를 넘겼는데, 밤이 되면 스스로를 심문하듯 몰아붙인다. 오늘의 나는 충분했는지, 괜히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혹시 눈치채지 못한 상처를 남기진 않았는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서 반성문을 쓴다. 고칠 수 없는 일들만 줄줄이 떠올리면서, 내일의 나에게 숙제를 미룬다. 이 생각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까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냥 더 피곤해질 뿐이다.

이 시간에는 꼭 특정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사람, 다시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 아니면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 낮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밤이 되면 그 사람의 말투나 뒷모습이 또렷해진다.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뒤늦게 고개를 든다.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후회라고 하기엔 너무 사소한 마음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이불속에서 조용히 숨을 쉰다. 애써 모른 척해온 것들이 밤이 되면 정직하게 출석을 부른다.

생각은 과거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끌어와 미리 괴롭힌다. 내일 해야 할 일, 언젠가 내려야 할 선택, 혹시나 어긋날지도 모를 미래. 머릿속에서는 늘 최악의 경우부터 상영된다. 잘될 가능성보다 망칠 가능성이 더 또렷하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하는 건데, 그 걱정 때문에 지금의 밤은 고스란히 망가진다. 내일의 불안을 오늘 밤에 다 써버리는 셈이다.

왜 하필 잠들기 전일까. 왜 마음은 꼭 쉬어야 할 시간에 가장 시끄러워질까. 아마 낮 동안 우리는 너무 열심히 괜찮은 얼굴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쁜 척, 단단한 척, 아무 일 없는 척 하루를 넘기고 나면, 밤은 그 대가를 요구한다. 낮에 밀어낸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문을 두드린다. 지금 아니면 언제 나를 보겠느냐는 듯이. 그 부름을 무시하면 잠은 더 멀어진다.

예전에는 이 시간이 싫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은 지치고, 괜히 마음만 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잠드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머리만 베개에 닿으면 바로 잠드는 사람들. 그런 능력은 타고나는 건지, 아니면 연습의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없는 재능처럼 느껴졌다. 나는 늘 생각이 먼저였다. 잠은 그 뒤를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게 되었다. 생각을 멈추겠다고 다짐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는 걸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속으로 말한다.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 밤을 넘기면 사라질 생각들도 많다고. 생각에게 자리를 내어주되, 전부 책임지지는 않겠다고. 그렇게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생각은 조금씩 힘을 잃는다.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나를 끌고 다닐 만큼 강하지는 않다.

잠들기 전의 생각은 때로 나를 단련시키기도 한다. 어떤 선택이 나를 지치게 했는지, 무엇이 나를 괜히 애쓰게 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 결과는 대단하지 않다. 인생이 바뀌는 결심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내일은 조금 덜 무리하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줄이자, 그런 아주 소소한 방향 수정 정도. 밤의 생각은 극적인 변화를 주지 않지만, 아주 조금씩 나를 옮긴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이런 의미 부여조차 하고 싶지 않은 밤도 많다. 그냥 잠들고 싶다. 생각이 많다는 게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말도, 성찰의 시간이라는 말도, 이 순간에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불속에서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조용해지는 것. 아무 생각 없이 깊이 잠드는 것. 깨지 않고 쭉 자는 것.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소원인지 모르겠다.

불을 끄고 눈을 감으면, 생각들은 처음엔 요란하다가 조금씩 속도를 늦춘다. 어떤 생각은 끝까지 남고, 어떤 생각은 중간에 흩어진다. 꼭 붙잡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은 잠과 함께 사라지고, 정말 중요한 감정만이 다음 날까지 남는다. 그 선별을 밤이 대신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 번의 뒤척임 끝에, 어느 순간 의식이 끊긴다.

잠들기 전의 생각은 하루의 끝이자, 나를 가장 솔직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로, 나에게만 들리는 말로 스스로를 마주한다. 그 시간이 버겁고 피곤해도, 어쨌든 나는 또 잠들고, 다음 날을 시작한다.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한 채로,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하루를 넘긴다.

한 번도 깨지 않고 부디 푹 잠이나 자면, 정말로 소원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