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장|계절

해변에 남겨진 오르골처럼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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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라. 나에게 계절은 봄의 개나리와 벚꽃, 그리고 여름 해변가에 누군가 두고 간 오르골이었다. 왜 하필 오르골이었을까. 손잡이를 돌리면 맑아야 할 음이 조금씩 어긋나던 그 소리를, 나는 아직도 여름이 오면 떠올린다. 계절은 늘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에게 도착했다. 달력보다 늦었고, 기대보다 비껴갔으며, 항상 무언가를 남겨 둔 채 떠났다.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됐다. 개나리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먼저 피어 있었다. 환영 인사를 건네는 법을 아는 꽃처럼, 아무 설명도 없이 계절의 문을 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자주 망설였다. 새로움은 늘 반갑지만, 동시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벚꽃은 더 화려했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예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소진되는 것들을 나는 그때 처음 배웠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에서는 약속이 자주 미뤄졌고, 말들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봄은 시작의 계절이라 불리지만, 나에게는 늘 질문을 남겼다. 모두가 앞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 나만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급함. 봄은 희망을 가장한 비교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여름은 소리로 기억된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모래 위를 지나가는 발자국, 그리고 해변 한쪽에 놓여 있던 작은 오르골. 오후 네 시쯤이었고, 모래는 아직 뜨거웠다. 누군가 잠시 내려놓고 간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돌아올 기척은 없었다. 손바닥에 올려보니 생각보다 가벼웠다. 여름이라는 계절도 늘 그랬다.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쥐어보면 허전한 무게. 여름의 기쁨은 늘 과했고, 그래서 더 빨리 빠져나갔다. 웃음은 쉽게 터졌고, 감정은 금세 달아올랐다. 사랑도, 기대도, 분노도 모두 같은 온도로 타올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알게 된다.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름은 가장 밝았지만, 가장 많이 흘려보낸 계절이었다.

가을이 오면 계절은 말을 줄인다. 바람은 방향만 바꾸고, 나무는 색으로 대신한다. 이 시기에 나는 자주 멈춰 선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가을은 정리의 계절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미련이 가장 많은 시간이다. 떨어지는 잎을 보며 우리는 자주 안심한다. 잃는 일도 자연의 일부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아직 놓지 못한 것들이 조용히 남아 있다. 가을은 슬픔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오래 남긴다. 그래서 이 계절에 떠올리는 이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은 마음을 단정하게 정리하는 손놀림을 닮아 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숨 쉬고 있다.

겨울은 모든 것을 비운 얼굴로 찾아온다. 색은 사라지고, 소리는 줄어든다. 남는 것은 온도와 숨결뿐이다. 겨울의 공기는 거짓을 허락하지 않는다. 잘 지내고 있다는 말도, 괜찮다는 표정도 금세 들통난다. 이 계절을 지나며 나는 생존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버티는 하루가 모여 하나의 계절이 된다는 사실을. 겨울을 견디는 동안 알게 된 것은 의외로 단순했다. 무엇을 더 가지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차가운 시간 속에서 오히려 나 자신과 가장 솔직하게 마주했기 때문이다. 겨울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대신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냈다.

나이가 들수록 계절은 기대보다 기억을 먼저 데려온다. 같은 봄인데도 어떤 해는 유난히 쓸쓸하고, 같은 여름인데도 어떤 해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계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계절을 통과하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절은 공평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축복으로, 누구에게는 시험처럼 다가온다.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는 말을 이제는 믿게 되었다. 이유 없이 밝아지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설명할 수 없이 가라앉는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나무라지만, 어쩌면 그것도 자연스러운 순환일지 모른다.

계절은 늘 무언가를 남기고 떠난다. 꽃잎 하나, 소리 하나, 잊힌 물건 하나. 그것들이 쌓여 기억이 되고, 기억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결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계절을 쉽게 믿지 않으면서도 끝내 의지하게 된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지만, 반드시 지나간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었던 것은 지고, 넘쳤던 것은 가라앉고, 얼어붙었던 것은 녹는다.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지금이 어떤 계절이든 괜찮다. 봄처럼 조급해도, 여름처럼 허전해도, 가을처럼 미련이 남아도, 겨울처럼 차가워도 괜찮다. 계절은 언젠가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된다. 나에게 계절은 여전히 개나리와 벚꽃이고, 해변에 남겨진 오르골이다. 당신에게 계절은 무엇으로 남아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