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장|지나간 사랑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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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ina Ustvolskaya – Composition No. 2 “Dies Irae” for Eight Double Basses, Piano and Percussion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니까 들춰내지 않는 게 맞다.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는 안다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뒤를 본다. 이미 사라진 뒷모습이 혹시 멈춰 서 있지는 않을지, 방향을 틀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지. 하지만 현실은 늘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문은 닫혔고, 바퀴는 앞으로 굴러갔으며, 정류장에는 나만 남아 있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혼자다.

지나간 사랑을 들춰낸다는 건, 이미 끝난 시간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일이다. 기억은 늘 과장된다. 좋았던 순간은 더 빛나고, 힘들었던 장면은 이유를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조금만 달랐더라면. 하지만 그런 말들은 위로처럼 들릴 뿐, 실제로는 나를 한 발짝도 앞으로 보내지 않는다. 떠난 버스를 붙잡겠다고 도로 위로 뛰어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위험하고, 무엇보다 쓸모가 없다.

사랑이 끝났을 때 가장 어려운 건 이별 자체가 아니다.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우리는 종종 이별 이후의 시간을 낭비한다.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자꾸 확인하고, 우연을 가장한 가능성을 계산한다. 혹시라는 말로 하루를 보내고, 만약이라는 단어로 밤을 넘긴다. 그렇게 시간을 쓰다 보면, 정작 내 삶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정류장에 머문다. 지나간 사랑은 그렇게 현재를 잠식한다.

들춰내지 않는다는 건 잊어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기억을 지워버리겠다는 무리한 다짐도 아니다. 다만 꺼내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이미 접어둔 종이를 다시 펼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다시 읽는다고 해서 문장이 달라지지 않고, 의미가 새로워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감정만 흐트러질 뿐이다. 접어두는 일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정리다.

사람들은 지나간 사랑을 의미로 포장하길 좋아한다. 그 사랑 덕분에 성장했다거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거나.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일과 계속 들여다보는 일은 다르다. 기초 공사를 마친 집에서 매일 땅을 다시 파헤치지 않듯, 지나간 사랑은 나를 떠받치는 일부로만 두면 된다. 그 위에 다시 살 필요는 없다. 과거에 머무는 건 추억이 아니라 정체다.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대개 같은 번호를 단 다른 버스 거나, 기억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시 만났다고 해서 같은 사랑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시간은 관계를 되돌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왜 그땐 그렇게 말했을까, 왜 조금 더 붙잡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질문들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나를 과거에 묶어둘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설명을 요구하지도, 이해를 구하지도 않기로 했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다시 마음을 증명해 달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상대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나를 소모시키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지나간 사랑에 매달리는 동안, 나는 현재의 나를 계속 미뤄두고 있었다.

지나간 사랑을 들춰내지 않는 태도는 차가움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온기다. 나를 더 이상 흔들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지금의 시간을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사랑이 남긴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형태를 바꾼다. 그리움이 되었다가, 무덤덤함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은 문장으로 남는다. 그 변화는 억지로 만들 수 없다. 다만 방해하지 않을 수는 있다. 들춰내지 않으면 된다.

버스는 돌아오지 않지만, 길은 계속 이어진다. 다른 방향이 열리고,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고개를 계속 뒤로 돌린 채 서 있으면, 도착하는 것들을 알아볼 수 없다. 지나간 사랑을 내려놓는다는 건 다음 사랑을 서두른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흐름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겠다는 게 아니라, 더 이상 과거로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사랑은 지나가도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상처일 수도 있고, 감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흔적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매번 손으로 긁어 확인하면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대로 두면, 언젠가는 피부가 된다. 지나간 사랑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순간은 완전히 잊었을 때가 아니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아졌을 때다.

나는 이제 지나간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이름을 꺼내지 않아도 하루는 잘 흘러간다. 비슷한 계절이 와도, 같은 노래가 흘러나와도, 잠시 멈췄다 다시 걸을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랑은 끝났고, 나는 남았다. 남은 사람이 할 일은 과거를 복기하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다. 들춰내지 않는 게 맞다.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정류장을 떠날 수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해서 무정해지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나간 사랑의 자리에 미련 대신 침묵을 남길 수 있다면, 그 침묵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준비가 된다.

사랑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지나간 사랑을 정리했다는 말은 완전히 비워냈다는 뜻이 아니다. 더 이상 그 사랑으로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 사랑은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통과했다. 이제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더 묻지 않고, 더 들춰보지 않고, 조용히 앞으로 가는 것. 그것이 지나간 사랑에 대해 내가 선택한 가장 단단한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