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by Helia

1월 1일, 새해니까 떡국을 먹는 게 맞겠지만 나는 만둣국을 먹었다. 굳이 전통을 거스르겠다는 의지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의미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다. 그냥 그날의 몸이 원한 선택이었다. 달력이 바뀌었다고 입맛까지 새로워질 필요는 없다고, 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이 오르는 국물 위로 만두가 천천히 가라앉고,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새해의 첫 끼니는 결심이 아니라 생활에 가까웠다.
1월 1일은 늘 큰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새해라는 이름을 달고, 무언가 달라져야 할 것 같은 기세로 문 앞에 선다. 하지만 막상 하루를 열어보면, 그 안에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공기가 들어 있다. 창밖은 여전히 겨울이고, 몸은 여전히 어제의 피로를 품고 있다. 이 날은 시작이라기보다 이어짐에 가깝다. 새로 쓰는 첫 문장보다는, 전날 문장의 끝에 찍힌 마침표 옆에 조용히 붙는 여백 같은 하루다.
식사를 마치고 운동을 했다. 새해니까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 때문은 아니었다. 숨이 차오르고 근육이 땅기는 감각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고, 땀이 맺히는 속도도 늘 비슷했다.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생각은 잠잠해졌다. 몸이 먼저 하루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한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몸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씻은 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했다. 새해 첫날의 공부는 의욕으로 반짝이기보다는 묵묵했다. 책장은 천천히 넘어갔고, 글자는 서두르지 않고 눈에 들어왔다. 나는 늘 그렇듯 하루의 리듬을 유지했다. 결심이 아니라 습관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새해라는 이름은 그 위에 얹힌 표식일 뿐, 하루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했다.
우리는 1월 1일에 많은 의미를 요구한다. 어제의 나를 지우고, 오늘의 나를 새로 세우길 바란다. 하지만 삶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루는 하루를 밀어내며 오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겹쳐진다. 그래서 새해 첫날은 의외로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현실의 체온이 또렷하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 있고, 하지 못한 일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어릴 적에는 이 날이 분명히 특별했다. 새 공책의 첫 장, 아직 손때 묻지 않은 여백,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때는 한 해가 통째로 새것으로 주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다. 한 해는 한 번에 건네지지 않는다. 하루씩 나누어 받아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1월 1일은 그 연속선 위에 붙은 작은 메모지 같은 날이다.
이 날이면 다짐이 늘어난다. 더 성실해지겠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하지만 다짐은 종종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삶이 생각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날짜가 바뀌어도 해야 할 일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1월 1일에 커다란 약속을 하지 않는다. 대신 덜 애쓸 것을 정한다. 괜히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아주 소박한 선택을 한다.
1월 1일에는 어제의 실패도 함께 따라온다. 미뤄둔 일, 끝내 완성하지 못한 계획,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 그것들은 달력 한 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날은 은근히 사람을 움츠러들게 한다. 남들은 벌써 출발한 것 같고, 나는 여전히 준비 중인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 중이라는 말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멈춘 것이 아니라,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이 날을 지나며 새삼 느끼게 된다. 삶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같은 날짜 위에 있어도 체감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분주하고, 누군가는 고요하다. 그 차이는 잘못이 아니라 조건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날을 축하보다는 존중의 마음으로 보낸다. 오늘을 살아내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하루로 남긴다.
관계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1월 1일이라고 해서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지는 않는다. 연락이 없던 사람은 여전히 조용하고, 애매했던 간격은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이 날에 관계를 새로 쓰지 않는다. 다만 마음속에서 분류한다. 계속 가져갈 마음과 내려놓을 마음을 구분한다. 그 선택만으로도 한 해는 훨씬 가벼워진다.
겨울의 햇빛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창가를 스치듯 지나가는 빛을 보며 알게 된다. 올해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 모든 변화가 이 날에 시작될 필요는 없다는 허락. 새해는 단번에 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조금씩 방향을 조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나는 이제 이 날에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는다. 잘하지 못한 것들을 세어보는 대신, 무너지지 않고 지나온 시간을 떠올린다. 눈에 띄는 성취는 없었을지라도, 하루를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새해는 더 잘 살겠다는 약속보다, 덜 상처받겠다는 다짐 하나면 족하다.
해마다 같은 날짜로 돌아오는 1월 1일은 해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나를 만난다. 어떤 해에는 무겁고, 어떤 해에는 담담하다. 그 차이는 내가 지나온 시간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날은 출발선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다시 걸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결국 1월 1일은 기적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 사이의 얇은 선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만둣국을 먹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 하루를 살아내는 일. 그리고 그런 하루들이 겹겹이 쌓여, 어느 순간 삶이 조금 달라져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그게 내가 받아들이게 된 1월 1일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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