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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도하는 밤

이 밤의 주도권은 누구의 것인가

by Helia

이 밤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창밖에서 먼저 말을 건 건 비였고, 나는 그 소리를 핑계 삼아 하루를 내려놓았다. 낮 동안 쥐고 있던 일정과 표정이 비에 젖어 풀어질 때, 밤은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빠져나간 자리에 빗방울이 들어앉고, 거리는 숨을 고르듯 느려졌다. 우산을 펼칠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비는 이미 결정을 끝냈다는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지 않아도, 도착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떨어지고, 번지고, 스며들 뿐이다. 밤은 그 단순함을 배경 삼아 모든 감정을 전면으로 불러낸다. 낮에는 각을 세워 숨겨두었던 생각들이 밤의 물기 위로 올라와 반사된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서 일그러질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오늘 하루 곧게 세워 두었던 마음이 사실은 이렇게 쉽게 휘어질 수 있었다는 걸.
비가 주도하는 밤에는 말이 줄어든다. 대신 소리가 늘어난다. 창틀을 타고 내려오는 빗소리, 멀리서 차가 물을 가르는 마찰음, 현관 앞에서 우산을 털어내는 둔탁한 박자. 그 소리들은 문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솔직하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그 틈에서 몸을 드러낸다. 설명되지 않은 서운함, 애써 무시했던 기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장면들이 소리 사이를 걸어 나온다.
이 밤에 사람은 종종 느려진다. 걸음이 짧아지고, 숨을 한 번 더 고른다. 빗속에서는 급할수록 더 젖는다는 걸 몸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 오는 밤에는 실패한 약속이 자주 떠오른다. 하지 못한 전화, 보내지 않은 메시지, 괜히 삼킨 사과. 낮에는 바쁘다는 말 뒤로 숨겨두었던 것들이 비에 씻겨 경계선을 넘어온다. 마음은 유리잔처럼 얇아져 작은 흔들림에도 소리를 낸다.
혹시 비 오는 밤에 괜히 연락처를 열어본 적이 있다면, 이 밤은 이미 당신 편이다. 보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문장을 쓰다 지운 기억이 있다면, 빗방울은 그 지워진 글자를 알고 있다. 비는 우리 대신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망설임을 그대로 두고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그래서 이 밤의 침묵은 더 크게 들린다.
비는 밤을 배경으로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웃음을 숨기던 얼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표정도 물기에 풀어진다. 창밖을 보다 문득 오래 전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골목의 냄새, 젖은 신발 속으로 스며들던 차가움. 기억은 늘 촉감으로 돌아온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서툴렀고, 동시에 대담했다. 젖어도 상관없다는 체념 같은 결심을, 비가 오는 밤에만 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면 비는 역할을 바꾼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안전해지고, 동시에 고립된다. 바깥의 세계는 빗소리로 흐려지고, 안쪽의 시간은 느슨해진다. 불을 하나만 켜둔 방에서 커튼이 조금 흔들릴 때, 비는 외부의 소음이 아니라 내부의 리듬이 된다. 심장의 박자와 빗방울의 간격이 묘하게 겹치면, 밤은 더 깊어지고 생각은 더 아래로 내려간다.
비가 주도하는 밤에는 잠도 쉽게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빗소리는 귓가에서 말을 건다. 괜찮다고, 오늘은 여기까지여도 된다고.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허락에 가깝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끝난 일에 다른 결말을 붙여보고, 오지 않을 내일을 미리 걱정한다. 비는 그 모든 상상을 말리지 않는다. 그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속도로 떨어질 뿐이다.
가끔은 이 밤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침이 오면 다시 단단해져야 할 마음을 잠시 미뤄두고 싶어서다. 비가 그치면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라갈 것이고, 우리는 정돈된 표정으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밤만큼은 다르다. 젖어도 괜찮고, 흐트러져도 괜찮고, 잠시 멈춰 서 있어도 괜찮다. 비가 앞에 서서 길을 정해주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걷는다.
비가 주도하는 밤은 결국 지나간다. 새벽이 오면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하늘은 조금씩 밝아진다. 하지만 이 밤을 통과한 마음에는 미세한 흔적이 남는다. 씻겨 내려간 것들과, 더 선명해진 것들. 비는 모든 것을 지우지 않는다. 불필요한 경계만 허물고, 감정의 결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다음 날의 우리는 어제보다 덜 날카롭고, 조금 더 무거운 눈빛을 갖게 된다.
그래도 다시 비가 오면, 우리는 안다. 이 밤의 중심에는 언제나 비가 있고, 우리는 그 아래서 잠시 진짜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이 존재하는 시간, 주도권을 내려놓아도 괜찮았던 밤. 비는 앞서 걷고, 우리는 따라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잠들지 못한 마음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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