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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런 사람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by Helia

아니라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관계는 이미 끝난 거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긴 해, 라고 묻는 문장이 입안에서 몇 번이나 굴러다녔지만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설명은 언제나 늦었고, 진실은 늘 귀찮은 손님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시작도 못 해본 싸움을 끝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희만큼은 내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친구라는 이름은 그런 순간에 빛을 발하는 단어라고 믿었다. 적어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지 않겠냐고, 잠깐만이라도 기다려 보자고 말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내 쪽에서만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질문하지 않았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대신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길. 그 길 위에서는 더 이상 복잡한 감정도, 귀찮은 맥락도 필요 없었으니까.
사람은 사실보다 결론을 먼저 믿는다. 설명을 듣기 전부터 마음속에 문장을 하나 적어두고, 그 문장에 맞게 기억을 정렬한다. 소문은 발이 빠르고, 의심은 자극적이다. 누군가를 단정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 없다. 고개를 끄덕이면 되고, 다수의 방향에 몸을 맡기면 된다. 그러면 생각은 멈추고, 멈춘 생각 위에 안도감이 내려앉는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네 글자는 그렇게 편리하게 모든 문장을 대체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해명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말할수록 더 말해야 했고, 설명할수록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다. 한 칸을 오르면 다음 칸이 무너지는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끝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고, 진실은 점점 나에게만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래서 멈췄다. 계속하는 것이 옳은 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나를 가장 빠르게 닳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였다.
가장 비참했던 순간은 오해를 들었을 때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오해받을 수 있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건, 내 편일 거라 믿었던 사람들이 이미 마음속에서 나를 정리해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판단을 유보해 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유보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용기였고, 용기는 번거로웠다. 그래서 쉬운 쪽을 택했다. 나를 이미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쪽을.
그날의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말을 아끼고 있을 때, 그들의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명확한 입장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애매함은 중립이 아니었다.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기울어진 세계에서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감각은 소음 없는 방처럼 또렷했다. 숨소리만 남고, 발자국은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선택했다. 진실을 더 말하는 대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기로.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사실처럼 들렸을 말. 이미 정해진 답을 그대로 건네는 쪽을 택했다. 그 말 한마디로 상황은 정리되었고, 표정들은 안도처럼 풀어졌다. 의심은 사라졌고, 질문도 끝났다. 그 순간 분명히 알았다. 그들이 원했던 건 진실이 아니라 결론이었다는 걸.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들이 믿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걸.
거짓을 말하는 데에는 이상한 평온이 따랐다. 변명도 해명도 아닌, 종결을 위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날카롭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웠다. 부드러웠기에 더 확실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인연의 매듭은 그렇게 끊어졌다. 풀린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잘라냈다. 잡아당기지 않기로 한 손으로, 조용히. 소리도 피도 없이.
물론 흔들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게 맞는 선택일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택한 내가 더 비겁한 사람은 아닐까. 하지만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진실을 들고 서 있는 자리에서 이미 나는 충분히 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택 이후 마음은 놀랍도록 가벼워졌다. 진실은 나에게 남겨두고, 그들이 필요로 한 허상만 건네주자 관계는 깔끔하게 끝났다. 누군가를 잃었다기보다, 오래 끌어온 오해의 방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문을 닫자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숨이 트였다.
사람들은 종종 정의와 공정을 말하지만, 실제로 관계를 움직이는 것은 피로도다. 얼마나 귀찮은가,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 얼마나 복잡한가. 진실은 늘 복잡하고, 오해는 단순하다. 그래서 오해가 이긴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결론은 생각을 멈추게 한다. 멈춘 생각은 안락하다. 그 안락함 위에서 관계는 쉽게 끊어지고, 책임은 흐릿해진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날의 선택이 나를 망가뜨리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경계를 배웠다. 모든 관계에 기대지 않는 법, 모든 친절을 신뢰로 환전하지 않는 법, 모든 침묵을 이해로 착각하지 않는 법. 사람은 말로도 상처를 주지만, 침묵으로도 충분히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긴 해. 이제는 그 질문을 타인에게 던지지 않는다. 대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나를 믿고 있는가. 남들이 붙인 이름보다 내가 살아낸 시간을 더 신뢰하는가.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다시 내 발목을 잡을 때, 나는 스스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가.
친구라는 단어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쉽게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기다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리게 묻고 끝까지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주 가끔은 만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판결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과의 대화는 증명이 아니라 호흡에 가깝다. 말이 도착하고, 도착한 말이 머무를 자리가 있다.
이미 그런 사람으로 규정되었던 시간은 내 안에 흉터처럼 남아 있다. 지워지지는 않지만, 그 흉터 덕분에 나는 더 정확해졌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마음을 내어줘야 하는지.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단정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 할 때, 나는 여러 문장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설명이 아니라 선택으로.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나를 잃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편의를 위한 결론일 뿐, 나의 전부가 아니다. 비참함은 지나갔고, 남은 건 단단해진 기준이다. 나는 더 이상 모든 자리에서 해명하지 않는다. 대신 내 삶의 문장들을 조용히 이어간다. 언젠가 누군가는 읽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믿는다. 이미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쓰이고 있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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