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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잠들지 못한 어둠의 밀도

by Helia

밤에 말이야. 유독 생각이 짙어진다. 낮에는 그럭저럭 흘려보낼 수 있었던 마음들이 밤이 되면 갑자기 무게를 얻는다. 이미 충분히 어두운 시간인데도, 생각은 스스로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마치 까만 도화지 위에 다시 까만 크레파스를 눌러 칠하듯이. 덧칠할수록 선명해지는 건 그림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윤곽이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생각은 또렷해진다. 그래서 밤은 언제나 정직하다. 숨길 것도, 포장할 것도 없이 마음의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니까.
밤이 되면 눈은 쉬고 싶은데 머리는 쉬지 않는다. 불을 끄면 모든 게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오산이다. 방 안은 고요한데 머릿속은 소란스럽다. 낮 동안 미뤄두었던 생각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별것 아닌 일 같았던 말 한마디, 괜히 신경 쓰였던 표정 하나,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기억까지. 낮에는 바람처럼 지나갔던 것들이 밤에는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추는 대신,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것들을 더 또렷하게 비춘다.
아이러니하지 않아? 이렇게 사방이 어둡고 조용한데, 잠은 오지 않고 생각만 깊어진다는 게. 밤은 분명 쉬라고 있는 시간인데, 정작 이 시간에 가장 많이 깨어 있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펼쳐질 뿐인데, 그 어둠 속에서 생각은 끝없이 형태를 바꾼다. 잠들기엔 너무 많은 생각을 했고, 깨어 있기엔 너무 늦은 시간. 밤은 늘 그 애매한 경계에 사람을 새워 둔다.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생각만 맴돌게 한다.
밤의 생각은 결론을 맺지 않는다. 대신 끝없는 질문을 남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때 그렇게 말했을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밤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질문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래서 밤에 드는 생각들은 늘 미완성이다. 쉼표로 끝난 문장 같고, 닫히지 않은 괄호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완성 상태가 밤에는 잘 어울린다. 모든 게 완벽히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시간 같아서.
밤이 깊어질수록 소리는 더 또렷해진다. 시계 초침 소리, 냉장고의 낮은 진동,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까지. 낮에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밤에는 존재를 주장한다. 그 소리들 사이에서 내 숨소리도 커진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단순한 행위조차 의식하게 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이렇게 선명해지는 시간도 드물다. 밤은 사람을 불필요하게 예민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솔직하게 만든다.
밤에 글을 쓰면 문장이 달라진다. 낮에는 설명하느라 길어지던 문장이 밤에는 자연스럽게 짧아진다. 단정하던 말은 흐려지고, 확신하던 생각은 여지를 남긴다. 밤의 문장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 않는다. 대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그래서 밤에 쓴 글은 다음 날 보면 낯설다. 너무 솔직해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너무 적나라해서 지우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낯섦조차 밤이 남긴 흔적이다. 그때의 나는 분명 그 문장들이 필요했으니까.
밤은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누구에게 연락하지 않을지, 어떤 이름을 오늘은 마음속에서 꺼내지 않을지. 밤에 내리는 선택은 차갑게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이다. 모두에게 다정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시간, 누군가의 기대에서 잠시 내려오는 시간. 밤은 그런 포기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지금은 이만하면 됐다고.
밤의 위로는 작고 조용하다. 큰 말도, 거창한 약속도 없다. 대신 켜둔 스탠드 불빛 하나, 따뜻해진 찻잔의 온기, 창밖에서 스치는 바람 소리 같은 것들. 그 사소한 것들이 마음을 붙잡아준다. 밤의 위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손에 쥘 수는 없어도, 손을 놓지 않게 해 준다. 그래서 밤은 외롭지만 잔인하지는 않다.
밤은 약속의 시간이기도 하다. 내일은 조금 나아질 거라는, 오늘보다 덜 흔들릴 거라는, 언젠가는 이 생각들도 잠잠해질 거라는. 그 약속들이 꼭 지켜지지 않아도 괜찮다. 밤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약속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밤에 세운 다짐은 실패해도 덜 아프다. 다시 밤이 오면, 다시 꺼내볼 수 있으니까.
밤이 끝나갈 무렵, 하늘은 아주 미묘하게 변한다. 아직 아침이라고 부르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완전한 밤도 아닌 색. 그 애매한 시간에 나는 종종 안도한다. 오늘도 무사히 밤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특별히 잘 해낸 것도, 완벽히 견뎌낸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밤은 늘 그렇게 끝난다. 대단한 결론 없이, 조용한 통과로.
밤에 나는 나를 가장 많이 만난다. 꾸미지 않은 목소리, 덜 다듬어진 생각, 숨기지 않은 감정. 낮에는 흩어졌던 나의 조각들이 밤에 와서 잠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오면, 그 조각들은 또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밤이 있다는 건, 다시 모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나는 밤을 믿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고, 증명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이 시간의 태도를. 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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