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속도로, 나를 데리고 가는 시간
걷다 보면,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면 나는 이유 없이 밖으로 나선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도, 답을 찾겠다는 각오도 없다. 다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서, 몸을 먼저 움직인다.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는 순간, 생각은 뒤로 한 발 물러난다. 걷기 시작하면 마음은 늘 발끝에서부터 풀린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감정들은 걸음에 맞춰 하나씩 제자리를 찾고,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은 숨을 고르듯 느슨해진다. 걷는 동안에는 나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애써 잘하고 있다고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한 발, 또 한 발.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하루는 생각보다 순하게 흘러간다.
걷다 보면 지나온 날들이 풍경처럼 스친다. 한때 자주 오가던 골목,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가게 앞,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던 나무 한 그루. 그 모든 장면이 나를 붙잡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예전에는 한 장면에 멈춰 서서 오래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부족했을까, 어디서부터 틀렸을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걷다 보면 미련은 걸음을 늦출 뿐,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전부였던 얼굴들이 이제는 인파 속 한 사람처럼 스친다. 서운함도, 아쉬움도 발걸음에 실려 옅어진다. 충분히 지나오면 이별은 상처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으로 남는다는 걸, 걷는 동안 조용히 배운다.
걷다 보면 말들이 가벼워진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문장들이 굳이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꼭 해야 했던 말,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 끝내 삼킨 말들까지도 발걸음에 맞춰 정리된다. 걷는 동안에는 변명이 줄어든다.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 진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귀하다. 누구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같은 속도로 걷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저 오늘의 나만큼의 속도로. 그 속도에서 나는 가장 덜 흔들린다.
걷다 보면 세상은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늘 다니던 길, 늘 보던 풍경, 늘 비슷한 시간대의 하늘. 반복되는 장면들 속에서 마음은 오히려 안정된다. 매번 새로울 필요는 없고, 늘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몸이 먼저 이해한다. 삶은 종종 반복 속에서 지탱된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야 변해가는 나를 감당할 수 있다. 걷다 보면 지루하다고 여겼던 일상들이 사실은 나를 붙들어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걷다 보면 외로움도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느끼는 고독은 방 안에 갇힌 외로움과는 다르다. 이 고독은 나를 가라앉히지 않고, 오히려 숨 쉬게 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외로움은 날카로움을 잃는다. 누구와 나란히 걷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나 혼자여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 그 확신은 대단한 사건 없이도, 조용히 발걸음 사이에 쌓인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커지는 게 아니라, 나를 부정할 때 커진다는 사실을 걷다 보면 알게 된다.
걷다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이 뒤따라온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예전보다 숨이 가빠지고, 무릎이 먼저 신호를 보내고,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진다. 하지만 그 느림 덕분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급할 때는 스쳐 지나갔던 표정, 바람의 방향, 오후의 그림자 길이. 빠를 때는 몰랐던 감정들이 느린 걸음 속에서 자라난다. 늦는다는 건 뒤처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본다는 의미라는 걸 걷다 보면 몸으로 알게 된다. 느려진 게 아니라, 시선이 넓어진 것뿐이다.
걷다 보면 닮아가는 삶이 보인다.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모습들과, 어느새 닮아버린 태도들. 부정하던 말투, 닮지 않으려 애썼던 선택들. 걷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게 된다. 닮아버린 것을 인정하는 순간, 바꿀 수 있는 것도 함께 보인다. 후회는 자책이 아니라 점검이 된다. 다음 걸음을 조금 다르게 내딛기 위한 준비처럼. 걷다 보면 나는 나를 심문하지 않고, 점검한다. 그 차이가 마음을 덜 아프게 만든다.
걷다 보면 감정은 소모되지 않고 흘러간다. 슬픔은 고여 있을 때 썩지만, 움직이면 옅어진다. 분노도 마찬가지다. 제자리에 머물 때는 커지지만, 걸음에 실리면 흩어진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날일수록 나는 걷는다. 해결하려 들지 않고, 이겨내려 애쓰지 않고, 다만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저 옆에서 함께 걷는 동행자처럼 존재할 뿐이다.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실패가 아니라는 걸, 걷는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걷다 보면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다. 오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도, 대단한 결정을 하지 못했어도, 그저 하루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진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나만의 리듬으로 걷는 시간. 그 시간은 나를 회복시킨다. 완벽하지 않아도, 흔들려도, 멈췄다 다시 걸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생긴다. 오늘 걷지 못했어도, 내일은 다시 발을 내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결국 걷다 보면 알게 된다. 인생은 뛰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사람이 도착한다는 것을. 얼마나 빨리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몇 번 넘어졌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시 일어나 걸었는지가 전부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어제보다 조금 느리거나,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걷다 보면, 길은 늘 발밑에서 생겨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