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얼굴들에 대하여

스쳐간 시간들은 어디로 가는가

by Helia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엔 늘 내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몸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가 빠진 느낌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을 때의 허전함과, 동시에 숨이 조금 쉬어지는 감각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마다 떠올랐다. 그간 숱하게 나를 스쳐간 이들은 정말 인연이 아니었을까.
헤어짐은 늘 문턱에서 시작된다. 문을 닫는 소리가 아니라, 문고리를 잡는 손의 온도에서. 이미 식어 있었던 온도를 뒤늦게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제야 이별이라는 말을 꺼낸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균열이 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이 줄고, 기다림이 늘고, 같은 질문에 다른 표정으로 대답하던 날들. 헤어짐은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대개는 조용히 자라 있다가 어느 날 모습을 드러낸다.

스쳐간 사람들을 떠올리면, 얼굴의 윤곽보다 장면이 먼저 남는다. 비 오는 날 함께 서 있던 버스정류장, 어색한 웃음이 흘렀던 카페의 창가, 늦은 밤에 주고받던 짧은 안부. 그 관계가 거짓이었나 묻게 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장면들이 선명하다. 오래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억은 늘 결과보다 앞선다.

우리는 인연을 오래 머무름으로 증명하려 한다. 함께한 시간의 길이를 재고, 남아 있는 사람의 수를 센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덜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그 계산에 잘 맞지 않는다. 오래 곁에 있었지만 나를 비껴간 사람도 있고, 잠시였지만 나를 바꿔놓고 떠난 사람도 있다. 시간의 길이와 흔적의 깊이는 서로 다른 자리에 놓여 있다.

헤어짐 이후에 남는 것은 질문이다. 왜 그 사람은 오래 머물지 않았을까, 나는 왜 붙잡지 않았을까, 아니면 붙잡지 말았어야 했을까. 질문은 답을 데려오기보다 밤을 데려온다. 생각은 늘 길어지고, 고요는 깊어진다.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모든 인연이 머무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어떤 만남은 도착을 위해, 어떤 만남은 방향을 바꾸기 위해 스친다.

스침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옷깃처럼 가벼운 접촉은 삶의 결을 바꾼다. 보폭을 조금 조정하게 하고, 말투를 달리하게 하고, 마음을 여는 각도를 바꿔 놓는다. 그 변화는 작아서 눈에 띄지 않지만, 되돌아보면 분명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에는, 스쳐간 이들의 흔적이 겹겹이 섞여 있다.

헤어짐은 비워내는 일이다. 누군가의 리듬에 맞추느라 생긴 습관들,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취향들, 그 사람의 하루에 내 시간을 접어 넣던 방식들. 이별은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놓게 한다. 비워진 자리에는 처음엔 공기가 차갑게 흐르지만, 곧 나의 호흡이 자리 잡는다. 누구의 기준도 아닌, 나만의 속도로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된다.

인연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남아 있는 사람만이 인연이라면, 떠난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가. 실패였다고 부르기엔, 그 만남들이 내 삶을 지나치게 단정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조금 느슨하게, 조금 단단하게 만들었다. 인연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가까운 말일지도 모른다. 머무름이 아니라 변화로 증명되는 관계.

헤어짐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관계가 다른 형태로 남는 방식이다. 더 이상 함께 걷지 않지만, 그 시간은 선택에 스며든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고,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다른 거리를 남기게 한다. 우리는 그렇게, 떠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옷깃을 스쳤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내 삶의 복도를 지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오래 머문 이도 있었고, 지나가며 공기만 흔들어놓고 간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머무르지 않았다고 해서, 인연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스침 또한 관계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헤어짐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된다. 어떤 만남은 나를 데려다 놓기 위해 존재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 길, 알지 못했을 감정, 배우지 못했을 나의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헤어짐은 늘 아프지만, 동시에 조용한 증명이 된다. 나는 누군가와 진심으로 함께했고, 그 시간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증명.

이제 나는 헤어짐 앞에서 예전만큼 조급해하지 않는다. 모든 인연을 끝까지 붙잡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스쳐간 시간들을 함부로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머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미를 지우지 않기로 한다. 떠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헤어짐은 인연의 부재가 아니라, 인연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헤어짐이 있었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았는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다음 만남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조금 더 온화하게 만든다. 옷깃을 스친 모든 순간이, 각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인연이었음을 믿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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