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량의 사랑을 끊어낸 날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 사랑을 멈췄다

by Helia

나는 그를 사랑하면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의 기분이 내 하루의 날씨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답장이 늦어지면 심장이 조여왔고, 짧은 한마디에도 밤이 길어졌다.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숨이 얕아졌다.


사랑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 처음부터 독을 마시겠다고 잔을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개는 반대다. 따뜻해지고 싶어서, 덜 외롭고 싶어서, 조금 더 환해지고 싶어서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그의 웃음이 좋았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안심처럼 느껴졌다. 그 눈빛 안에서 나는 안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느낀 자리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약속 장소에 늘 먼저 도착해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던 저녁들, “괜찮아”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던 순간들. 사실은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식을까 봐 삼켰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자주 내 마음을 접어 넣었는지.


약물에도 치사량이 있다. 몸에 이롭던 성분도 정해진 선을 넘으면 심장을 멈춘다. 감정도 다르지 않다. 적당히 흐를 때는 생기를 주지만, 넘쳐흐르면 숨을 막는다. 나는 그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나라는 사람을 덜어냈다. 그가 좋아할 말을 고르고, 그가 편안해할 표정을 지었다. 나를 맞추는 일이 사랑의 방식이라 믿었다.


그의 하루가 힘들다고 하면 내 하루는 접혔다. 그가 예민해 보이면 나는 더 부드러워졌다. 이해하는 쪽은 늘 나였다. 한 번쯤은 서운하다고 말해볼까 싶다가도, 괜히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입을 다물었다. 사랑은 배려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배려가 반복되자 균형은 무너졌다. 나는 조금씩 기울어졌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섰는데 낯선 얼굴이 있었다. 눈빛이 흐릿했다. 웃고는 있었지만 빛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는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 그 질문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았다. 그제야 아주 작게 인정했다. 이 감정은 나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고.


그를 기다리며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날이 떠오른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고, 그는 “조금만 늦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쓰는 게 더 쉬웠다. 그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늘 괜찮은 사람이 되려 애쓰고 있었다는 걸. 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사람,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느라 나를 비워내고 있었다.


사랑은 서로를 살게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를 살리느라 나를 굶기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미루고, 만나고 싶지 않은 날에도 억지로 나갔다. 그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하는 척했고, 그가 싫어하니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취향과 기분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조차 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작은 신호들이 있었다. 대화가 자주 어긋났고, 그의 말은 가끔 나를 가볍게 지나쳤다.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어딘가가 시렸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모든 걸 정당화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누구나 이렇게 맞춰가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독은 천천히 퍼진다. 쓰러질 만큼 아프지 않으니 괜찮은 줄 안다.


어느 밤, 답장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의 연락일까, 아니면 그가 나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확인일까. 그 순간 알았다. 나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인정받기를 구걸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놓지 않기를 바라며 나를 더 많이 내어주고 있었다.


나는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곁에 서기 위해 나를 지워야 한다면, 그 자리는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니다. 사랑은 함께 커지는 감정이지, 한 사람이 줄어드는 구조가 아니다.


결국 멈추기로 했다. 더 마시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뒤늦게 찾아왔다. 손을 놓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익숙함은 중독처럼 남아 있었다. 그와 함께하던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알았다. 이 통증은 죽음이 아니라 회복의 과정이라는 걸. 독이 빠져나갈 때 몸이 떨리듯, 마음도 흔들릴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숨이 깊어졌다. 그의 눈치를 보지 않는 하루는 낯설었지만 가벼웠다. 하고 싶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싫다고 말해도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 나를 지키는 일이 누군가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게 이기심이 아니라는 걸 천천히 배웠다.


사랑은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야 한다. 함께 있을수록 내가 선명해지고, 웃음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만약 점점 흐려지고 작아지고 숨이 얕아진다면, 그 감정은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아무리 달콤해도 나를 갉아먹는다면 멈춰야 한다.


이제 나는 치사량의 사랑을 경계한다. 처음엔 따뜻해 보여도, 나를 줄여야 유지되는 관계라면 돌아선다. 내 중심을 내가 쥐고 있는 상태에서 손을 잡고 싶다. 나를 잃지 않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다.


나는 이제 나를 지우는 방식의 사랑을 하지 않는다. 사랑은 나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나를 더 크게 만드는 일이어야 하니까. 내 숨이 고르게 이어지고, 내 이름이 또렷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만 사랑을 시작하겠다.


그게 내가 끊어낸 치사량의 사랑 이후에, 비로소 배운 적정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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