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시보다 먼저 다가온 상실

나는 아직 쓰지도 못했는데, 상실이 먼저 왔다

by Helia

나는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는데


상실이 먼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날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그 기척은


내 방의 공기를
먼저 바꾸어 놓았다


이해보다 먼저 오고


설명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것


어떤 이별은


문장보다 먼저
도착한다


나는 펜을 들었지만


잉크는
마른 숨처럼 끊어졌다


쓰려고 할수록


단어는
상실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기보다


조용히
비워놓았다


웃음은 늦게 왔고
밤은 조금 더 길어졌다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하나의 계절이
끝나 있었다


나는 알았다


상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마 우리도
그런 날을 겪었을 것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무언가가
먼저 도착해 버린 날

그날의 우리는
조금 느리고
조금 조용하다

그러나

그것이 약함은 아니다

상실은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

나는 오늘도
완성되지 않은 문장 앞에 앉는다

시보다 먼저 다가온 상실을
서둘러 밀어내지 않는다

비워진 자리를
함부로 채우지 않는다

어떤 문장은

비워진 뒤에야
비로소 단단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상실은 먼저 왔지만

나를 모두 가져가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
쓰지 못한 문장처럼

여기 남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그러니 오늘은

쓰지 못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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