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지지 않는 자리
공허한 마음 한 구석에
너라는 흔적이 가득하다.
없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그 자리를 비워두지 못한다.
너는 떠났고
시간은 분명히 흘렀다.
그런데도
마음은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나는 여러 번
너를 지우려 했다.
정리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지워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장면이었다.
목소리의 높낮이,
웃음의 결,
무심히 건네던 한마디.
그 모든 것은 사라졌는데
이상하게도
너라는 흔적만은
더 또렷해졌다.
공허는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가득 차 있는데
닿을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 사실을
늦게야 이해했다.
너는 없다.
그런데도 마음은 가득하다.
이미 식은 잔열처럼
만질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남아 있는 온기.
나는 그 온기를
굳이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완전히 비워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도
마음 한쪽에
그런 자리를 품고 살아갈 것이다.
없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
부르지 않아도 떠오르는 이름.
나는 오늘
그 여백 위에 가만히 눕는다.
지우려 애쓰지 않고
채우려 서두르지 않는다.
공허를 인정하는 순간
나는 조금 덜 흔들렸다.
가득함을 부정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이 고르게 내려앉았다.
너는 없지만
너의 흔적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비워지지 않는 자리는
어쩌면
나를 증명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여백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지나온 시간이 고요히 쌓여 있으니.
가득한 여백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안다.
완전히 비워지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