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는 왔지만 오지 않았다.
추천곡: 쇼팽 – Prelude Op.28 No.15 “Raindrop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정류장 옆 벤치에 앉았다.
비는 오지 않았다.
날씨 앱을 봐도 강수 확률은 0%.
그러니 나는 우산도 들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지나고,
그는 오지 않았다.
20분이 지났을 땐, 핸드폰을 한 번 열어봤고,
30분이 지나자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어디야?”
답장은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마음에
오는 버스 아무거나 올라탔다.
바깥 풍경이 멍하게 흘러가던 중이었다.
그 순간,
창밖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였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틀릴 리 없었다.
그가 입었던 셔츠, 걸음걸이,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그 표정까지.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채,
정류장을 지나쳤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못 온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오겠다고 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았다'라고 믿었던 내게
‘왔는데도, 그냥 지나쳤다’는 현실은
더 깊은 구멍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고도 없이.
우산이 없던 나는
비에 젖은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피아노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쇼팽의 Raindrop Prelude.
낮고 반복적인 건반 위로,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반복되는 피아노 음은
마치 그날 내가 보낸 메시지처럼,
허공에 맴돌다 사라졌다.
그 음이 거세지는 순간,
내 안의 감정도 몰아쳤다.
그에게 바랐던 한 마디,
그가 말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
내가 감췄던 자존심까지.
'그날 그는 왜 그러했을까.'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냥 보고도 모른 척한 건지,
혹은 스쳐간 게 우연이었는지.
하지만 쇼팽의 이 곡은
그날의 나를 기억하는 것 같다.
창밖 풍경과,
스쳐 간 눈빛과,
갑작스레 내리던 비의 냄새까지.
지금도 이 곡을 들으면,
나는 그날의 정류장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다시 기대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음악은 모든 걸 말해주진 않는다.
다만 그때 그 감정을
다시 꺼내 보게 한다.
그리고 결국,
조용히 나를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