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스멀스멀 올라오는 꿉꿉함에 대하여

내면의 장마

by Helia

장마는 늘 예고 없이 시작된다. 기상청이 며칠 전부터 장마전선이 북상 중이라고 말해도, 진짜 장마는 언제나 몸이 먼저 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습기, 말갛던 공기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눅눅한 냄새, 바닥을 스치며 올라오는 꿉꿉한 감촉. 장마는 소리 없이 시작되지만,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우리를 휘감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이상한 무게. 침대보는 축축하고, 베개는 어딘가 눅눅하다. 분명 에어컨을 켜고 잤건만, 피부 위에 얇게 눌러앉은 습기는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몸을 감싼다. 거울 속 내 얼굴도 유난히 피곤해 보인다. 그런 날이면, 물에 젖은 마음처럼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질척거린다.

장마의 꿉꿉함은 단지 물리적인 감각만은 아니다. 피부에 스치는 불쾌지수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묵은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미처 말하지 못한 말들, 정리하지 못한 기억들, 방치해 둔 감정의 습기들이 내면 어딘가에서 곰팡이처럼 자라난다. “괜찮다”라고 무심코 덮어버린 감정들 사이로, 장마는 아주 교묘하게 스며든다.

그렇다고 장마를 미워할 수도 없다. 이 계절은 분명 불쾌하지만, 그만큼 솔직하기 때문이다. 마른하늘 아래서는 감추고 지나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장마 아래에서는 진실을 드러낸다. 나무껍질의 결도, 시멘트 벽의 균열도, 사람 사이의 거리도 이 비 속에서 더 적나라하게 보인다. 아무리 감춰도 젖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애써도 물드는 것들을 장마는 일깨운다.

나는 이 장마철에 문득 내 안의 ‘꿉꿉함’을 들여다본다. 무심코 지나쳐온 마음들, 웃으며 삼켜버린 대화들, 억눌러온 슬픔과 피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눅눅한 수건처럼 마음속에 걸려 있다. 그런 내면의 빨래를 햇볕에 내다 말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장마는 아직 며칠이고, 몇 주고 더 남아 있다.

우산을 들고 밖에 나선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바닥은 질퍽하다. 하지만 그 사이를 걷다 보면, 장마만의 풍경이 있다. 초록은 더 짙어지고, 나뭇잎 사이로 굵은 빗방울이 맺힌다. 거리에 쏟아지는 물소리, 빗물에 비친 조명,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리듬. 장마는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운다. 미처 듣지 못한 소리, 보지 못한 색, 지나쳐온 냄새. 꿉꿉함 사이로, 세상은 더 촘촘하게 다가온다.

장마가 끝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물에 씻긴 풍경처럼, 어쩌면 우리도 조금은 정화되어 있을지 모른다. 견디기 힘들었던 습기와 무거움 속에서도,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충분히 들여다봤다면 말이다. 꿉꿉함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눅눅하고 불편했지만, 결국은 지나가는 계절처럼, 그 감정들도 머물다 떠나는 손님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니 장마는, 때로는 감정을 씻어내는 시간이다. 뿌리 깊은 불안도,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애정도, 비를 핑계 삼아 흘려보낼 수 있는 계절. 이 꿉꿉함을 견디는 사이, 나는 어쩌면 조금 더 솔직해지고,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장마는 그렇게 우리를 더듬게 하고, 멈춰 서게 하고, 다시금 내 마음을 닦아보게 한다.

그래서 꿉꿉함은 불쾌한 동시에 필요한 감각이다.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아직 마르지 않은 감정들의 온기다. 장마는 오늘도 내 방 창가에 스며들고, 나는 오늘도 그 꿉꿉함 속에서 내 마음의 습도를 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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