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끔은 진심으로 생각해 본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장례식에 올까.
지금 당장 나라는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은 그대로 흘러갈 거고,
출근 시간엔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고,
카페는 오늘도 테이크아웃 잔을 줄줄이 내줄 것이다.
누군가는 회의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품할 것이고,
누군가는 데이트를 하고,
또 누군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겠지.
나는,
그 하루에서 빠져나간다.
그럼 내 자리는?
내가 쓰던 이불, 내가 앉던 의자, 내가 자주 걷던 골목.
그런 것들도 결국은 정리되고 치워지고
아무 일도 없던 듯 덮이겠지.
그런 상상을 할 때면 마음이 쓸쓸하다 못해 투명해진다.
‘아무도 안 올 거야’라는 확신이
나를 미리 한 번 죽이는 느낌이다.
엄마는 올까?
슬퍼할까?
글쎄, 아마
보험금이 얼마나 나오는지부터 계산기 두드리지 않을까.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울기보단,
이게 왜 이렇게 됐는지, 누구 탓인지 따지느라 더 바쁠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한테서
“너 없이 나는 어떻게 살아”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네가 있어서 내가 손해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사람의 눈물은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아니, 기대조차 되지 않는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다.
몇몇 사람들과 어울려본 적은 있지만,
속마음을 꺼낸 적은 없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어색해질까 봐,
상대가 멀어질까 봐,
늘 가벼운 이야기만 꺼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사라졌을 때,
그들은 그저
“아, 안타깝다” 정도로 말하고
곧바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누군가 내 사진을 보고,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줄까.
어쩌면 내 흔적조차 관심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너무 외로워서,
나는 가끔 상상 속에서라도
누군가를 불러본다.
‘장례식장에 아무도 없다면
하늘에서라도 할머니가 내려오시려나.’
할머니는 나를 키운 사람이었다.
무뚝뚝하고 말도 적으셨지만,
나를 향한 손길만큼은 늘 따뜻했다.
밤마다 이불을 덮어주며
“다른 건 몰라도 따뜻하게는 자야지” 하시던 그 말이
이제야 마음속에서 온기를 낸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 조용히 와서
향을 피우고, 내 손을 한번 잡아주셨겠지.
그걸로 나는 괜찮았을 텐데.
사람은
살면서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한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까.”
나는 그걸 너무 자주 생각해 왔다.
슬프게도,
지금껏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1순위’였던 적이 없다.
아파도 병원에 같이 가줄 사람이 없고,
좋은 일이 있어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이 없다.
연락처 목록은 많지만,
“지금 당장 보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는 건
누군가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 아니라,
그저 조용한 정리일 뿐일 것이다.
나라는 파일 하나가 삭제되는 정도의 의미.
사람들이 말하는 ‘인연’이나 ‘운명’ 같은 것과는 무관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다.
이토록 외롭고 텅 빈 마음을 안고도
아직 숨 쉬고 있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이런 생각을 털어놓을 단어를 고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상상할수록
살아 있음이 더 선명해진다.
내 장례식에 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혹시 누군가, 아주 먼 날에라도
이 글을 읽고
“이 사람, 참 조용히 아팠구나”라고 말해줄까 봐.
누군가 그런 마음으로
흰 국화를 들고,
“당신을 몰랐지만, 애썼어요”라고 말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은
살아 있는 동안
그 한 사람을 만나보려고,
기다려보려고,
나를 버리지 않기로 한다.
내 장례식장엔
정말 아무도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내 편이라면
그건 죽음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 아닐까
>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내 이름 앞에 조용히 꽃 한 송이 놓아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괜찮을 것 같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아주 조용히, 나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