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약속을 잡지 않는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땐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
기분이 태도가 될까 봐.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투가 튀어나올까 봐.
무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까 봐.
그 모든 게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
그 기운은 온몸에서 은근하게 새어 나온다.
표정에서, 말투에서, 템포에서.
심지어 말 한마디 없이도,
분위기라는 건 묘하게 전염된다.
그걸 알기에
나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 내준 사람에게
내 감정이 물든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특히 친구를 만날 때면
늘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이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함께 웃고,
맛있는 걸 나누고,
어떤 고민이든 기꺼이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는 날만 있진 않다.
때때로는
내 마음이 눅눅하게 젖어 있다.
어떤 말도 위로되지 않고,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날들.
그런 날은
침묵이 나를 감싸고,
그 침묵은 날카롭게 뾰족해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뾰족한 감정이 누군가를 향할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아예 약속을 잡지 않는다.
무례해질까 봐.
무심해질까 봐.
말 한마디가, 눈길 하나가
상대에게 비수처럼 꽂힐까 봐.
내가 무서운 건
내 기분이다.
나는 내 감정의 파도를
때로는 제어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내 안의 폭풍이
누군가의 맑은 하늘을 뒤흔드는 걸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혼자를 택한다.
조용한 방 안에서
그저 음악을 틀어놓고
고요하게 하루를 보낸다.
가끔은 이런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싶을 때도 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분은 나눌 수도 있고
친구라면 그런 날도 함께 견딜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는
내 기분이 누군가의 하루를 어둡게 만들까 봐
스스로 감정의 거리를 둔다.
그건 회피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다.
예전에 한 번,
기분이 안 좋았던 날,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날 나는 웃지도 않았고
대화의 흐름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친구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가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오늘 너 무슨 일 있었어? 나한테 화났나 해서 좀 속상했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화난 것도 아니고,
그 친구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날은 마음이 너무 고단했고,
나 자신조차 감당이 안 되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내 감정이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날 이후,
나는 결심했다.
내 기분이 태도가 될 것 같은 날엔
누구도 만나지 않기로.
그게 내 방식의 다정함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냥 나가서 친구를 만나. 기분 전환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기분 전환이 되지 않는 날이 있다는 걸
그 사람은 모른다.
그저 억지로 웃고
대화에 끼려 애쓰다가
돌아오는 길엔 더 공허해진다.
그럴 바엔
혼자 있는 게 낫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왜 오늘은 이렇게 가라앉았는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무겁게 만드는지.
때로는 이유가 없고
때로는 오래전 상처가 불쑥 떠오른다.
그럴 땐
말없이 울기도 하고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날,
햇살이 조금 더 따뜻해진 아침엔
조심스럽게 사람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내 감정이 누군가의 마음을 덮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스스로를 가둔다.
하지만 그 안에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이 숨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친구를 아낀다.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은 날
만나지 않는 거다.
그건 미루는 게 아니다.
그건 도망치는 게 아니다.
그건,
사랑하는 방식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혼자 있는다.
내 기분이 태도가 될까 봐,
누군가의 맑은 하루를 흐리게 하지 않기 위해.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다정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