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한편의 시간
책장을 정리하다,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노르스름하게 바랜 종이, 군데군데 벗겨진 겉표지, 그리고 손때 묻은 귀퉁이. 새 책의 반듯한 반짝임은 없지만, 그 책을 손에 쥐는 순간 느껴지는 건 ‘시간’이었다.
그 책은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다. 말없이 곁을 지켜주지만, 필요할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묵직하고 다정한 존재.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꺼내 들려줄 수 있는 존재. 문득, 그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았지만, 가물가물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그 책은 말없이 책장 한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종이에서는 은은한 먼지 냄새와 잉크가 바랜 냄새가 뒤섞여 풍겨 나왔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곰팡내’ 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쌓인 향기였다. 어린 시절, 도서관 한구석에서 발견했던 오래된 책들, 책을 넘기며 노트를 들춰가며 필기를 하던 밤들,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숨죽이며 읽었던 장면들이 스르르 떠올랐다.
이 책은 내가 중학생 시절 우연히 동네 헌책방에서 샀던 소설이었다. 그땐 책값이 없어서 용돈을 아껴 커피도 안 마시고, 친구들과 떡볶이도 안 먹은 채 모은 돈으로 샀던, 내 첫 번째 ‘소유한 책’이었다. 책을 사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읽었고, 단숨에 다 읽고는 며칠이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 이야기가 내 안에 너무 깊이 들어와서,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었던 시절. 그런 기억이, 이 낡은 책 한 권에 담겨 있었다.
책은 기억의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어떤 장면을 기억하지 못해도, 책의 문장을 보면 갑자기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책을 읽던 계절, 책을 읽던 마음, 그리고 그 책을 고른 이유까지. 나는 왜 그때 이 책을 골랐을까.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을까, 아니면 무언가에 기대고 싶었을까.
오래된 책은 단순히 오래된 활자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 책이 간직한 시간, 감정, 눈물, 위로, 질문과 답, 그리고 미처 끝내지 못한 사랑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때론 책갈피 사이에서 누렇게 바랜 메모지나 꽃잎 하나가 발견되기도 한다. 나는 한 번, 그런 꽃잎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작은 들꽃이었고, 누군가의 손에 눌려 얇게 말라붙은 채 조용히 책 속에 잠들어 있었다. 꽃잎 하나가 전해주는 그 사람의 정성, 그리고 그 순간의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그런 기억이 있다.
책을 넘기다가, 내가 줄을 그어두었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사랑은 결국,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문장을 읽은 순간, 가슴 한쪽이 알알하게 저려왔다. 내가 왜 그 문장에 밑줄을 쳤는지, 그 이유는 몰라도 그때의 마음은 생생히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누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 내 마음을 오래 기억해 주길 바랐던 걸까.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나를 읽는 일이다. 글 속의 인물을 따라가면서, 사실은 나의 감정과 상처와 기대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오래된 책은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나를 끄집어낸다. 그 책을 읽던 17살, 혹은 25살, 혹은 30살의 내가 내 안에서 다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너, 그때 이런 마음이었잖아. 그거 아직도 그대로 있지?”
책 한 권이, 말없이 내 마음을 읽어내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래된 책은 그렇게, 잊고 지낸 나를 다시 나에게로 데려다준다. 그것이 책이 가진 힘이고, 낡은 책이 가진 깊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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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속도를 추구한다. 더 빨리 읽고, 더 많이 보고, 더 쉽게 소모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책조차도 디지털화되어, 화면을 넘기며 읽는다. 당연히 편리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손때가 없다. 냄새도 없다. 물성을 잃은 책은 기억의 온기도 덜하다. 나는 오래된 책을 손에 쥘 때마다, 그것이 단순히 읽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존재’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낡은 책을 왜 아직도 가지고 있어?”라고. 하지만 그런 질문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왜 아직도 만나는 거야?”라고 묻는 것과 같다. 오래된 책은 기억의 친구이고, 마음의 벗이다.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었던 말들, 위로가 되었던 문장들,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이야기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이만큼은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래된 책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낸 시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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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책장에도 그런 책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모서리가 해지고, 누렇게 변한 종이로 이뤄진 책. 다시 읽자고 펴 들진 않았지만, 한 번도 버리진 못한 책. 그 책에는 당신이 있다. 사랑했던 날이, 울던 밤이, 웃으며 줄을 그었던 순간들이 담겨 있다.
나는 오늘, 그 오래된 책을 책장 맨 앞줄에 다시 꽂는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장 가까운 곳에. 그렇게 나를 잊지 않기 위해,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지켜봐 줄 수 있도록.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