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나에게 말을 걸 때,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기력해지던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새벽이라고 하기엔 밝고, 아침이라고 하기엔 아직 고요한 그 시간. 휴대폰을 확인하니 오전 7시 정각이었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고, 어젯밤 늦게 잔 것도 분명한데, 눈이 번쩍 떠졌다. 마치 누군가가 “지금이야”라고 속삭이듯, 이상할 만큼 개운하고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가득했다.
어쩐지, 이 날은 특별할 것 같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방안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잊었던 어떤 기억이 슬며시 내려앉는 듯한 풍경.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창밖의 거리, 그리고 잠든 고양이처럼 조용히 숨 쉬는 도시. 나는 이 평온한 아침이 너무도 아까워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대체 이 감정은 어디서 온 걸까.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아니, 사실은 그냥 살아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였다면 알람을 몇 번이고 미루고, 이불속에서 하루를 미뤄버리기 바빴을 나였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고, 마음도 무장해제된 듯 평화로웠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오랜만에 내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부은 눈, 다 풀린 눈매, 왼쪽 뺨에 눌린 자국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아무리 망가져 있어도, 살아 있음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으니까.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 평소였다면 건너뛰기 일쑤였던 아침식사.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 적당히 데우고,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아침 식탁이지만, 그날은 괜히 정갈하게 세팅해보고 싶었다. 삶을 대접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조용한 음악을 틀고 커피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행복일지도 몰라."
누군가와의 특별한 만남도, 놀라운 성취도, 깜짝 놀랄만한 기쁨도 없지만, 그저 나에게 정성을 쏟고 살아가는 이 순간. 이렇게 작은 조각들이 쌓여 하루를 이루고, 삶이 되는 거겠지. 사람들은 늘 ‘이후’에 올 무언가를 기다리며 오늘을 지나친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의 오전 7시는,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선물처럼 다가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이런 아침을 잃어버리며 사는 걸까?
언제부턴가 ‘일찍 일어나는 것’은 효율과 성취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7시는 그런 게 아니었다. 더 빨리 무언가를 하려는 다짐이나, 타인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없었다. 오히려 세상에 뒤처지더라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내 안의 조용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햇살은 점점 선명해졌고, 내 방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한 번 웃었다. 이건 꽤 오래전, 어린 시절의 감각이기도 했다. 일찍 눈이 떠져 아무도 깨지 않은 집 안을 혼자 누비던 아침. 그때의 나는 괜스레 부엌으로 가서 엄마를 도와드릴 것도 없이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식탁에 올라앉아 뻔히 아는 만화책을 또 읽고, 빨래에서 풍겨오던 햇볕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 시절엔 하루하루가 선물 같았던 것 같다.
오늘을 살기 위해 눈 떴던 것이 아니라, 오늘이 좋아서 눈이 떠졌던 시절.
그날의 오전 7시는 그 기억을 닮아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작은 노트북을 켰다. 뭔가 쓰고 싶어졌다. SNS도, 메일함도, 뉴스도 아닌 텅 빈 문서창을 열고 ‘오늘’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없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바닥에서 떠오르는 단어들. 그날의 하늘, 아침 햇살, 커피 향, 거울 속 나의 눈빛. 글이 써지는 동안 나는 더없이 나답고, 더없이 살아 있었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 대단한 날’을 기억한다. 첫사랑, 이직, 이사, 여행, 수상, 이별. 그런데 정작 삶을 바꾸는 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이 기억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에게 기적 같은 하루.
그리고 그런 날은, 대체로 “아무 이유 없이 눈이 떠진 아침”에서 시작된다.
신호처럼.
예고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운명의 부드러운 손짓처럼.
그날 이후로 나는 아침이 무서워지지 않았다.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견뎌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내 방식대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가도, 빛나지 않아도, 그저 하루를 사랑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그런 허락.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아침의 감각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비 내리던 날도, 짜증 나는 회의로 가득 찬 날도, 사람 때문에 마음이 꺼져버리던 날도…
그날의 오전 7시를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믿게 된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눈이 떠지고, 괜히 모든 게 괜찮아 보였던 날.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느껴졌던 아침.
그게 바로 삶이 당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